#1 짐 모리스
옛 영화를 다시 보다. 야구를 주제로 한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 또는 그 중 하나. 영화 자체의 완성도를 떠나 그냥 좋아하는 영화다. 보다보면 흐뭇해지는 영화다. 아마도 ‘꿈을 향한 도전’이라는 진부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소재를 다뤘기 때문일 것일 테지만. 2002년인가 2003년, 비디오(!)로 본 이후 네 댓 차례는 본 듯 하다.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35세의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 리그 역사상 가장 늙은 신인이 된 전직 고등학교 화학 교사의 이야기. 한 때 프로선수를 꿈꿨지만 어깨 부상으로 좌절한 뒤 교사로 전직한 짐 모리스는 텍사스 소도시 빅 레이크의 고교 야구 코치도 겸직하고 있다. 늘 지기만 하는 팀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지역리그 우승을 하면 프로팀 입단 테스트(트라이 아웃)를 받겠다”고 공언했는데, 제자들이 덜컥 우승을 해버려 ‘어쩔 수 없이’ 트라이 아웃에 나선다. 그런데 운동을 쉬는 동안 부상이 나아버렸고, 90마일 후반대의 빠른 볼을 던지게 된 그를 프로팀인 템파베이 데블레이스에서 스카우트 한다. 순탄치 않은 마이너 리그 생활을 이겨낸 뒤 드라마틱하게도 고향인 텍사스에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른다는 이야기다. 갓난아기를 포함해 세 아이를 데리고 경기장에 나가 트라이 아웃에 참가한다는 비현실적인 설정이 영화적인 재미를 더한다.
실제로 모리스는 두 시즌을 더 뛴 뒤 부상이 재발해 은퇴한다. 데뷔할 때가 이미 다른 선수들은 은퇴할 나이였으니, 꿈을 이룬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모리스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자서전(The Oldiest Rookie)을 썼고 자서전 내용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모리스는 이후 자기계발 강연 시장에 뛰어들어 회당 1만 달러 이상을 받는 강사가 됐다고 하니, 꿈을 향한 집념이 그의 인생을 바꾼 셈이다.
# 2 데니스 퀘이드 & 브라이언 콕스
야구공을 던지는 모습이 다소 어색하기는 하지만 ‘늙은 신인’ 모리스의 역할을 맡은 한 데니스 퀘이드의 연기도 볼 만 하다. 늙은 신인 역할을 맡은 늙지 않는 배우. 1954년생이니 영화가 개봉됐을 때 퀘이드의 나이가 만으로 마흔 여덟이다. 그 나이에 서른다섯 야구선수 역할을 맡은 것도 대단한데, 영화 속에서 군살 없는 탄탄한 몸을 보여주면서 프로다운 면모를 과시한다. 조금 과장하면 25년 전 이너 스페이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모리스의 메이저리그 데뷔전 당시의 몸이 퀘이드보다 더 후덕한 것처럼 보인다. 이후 급격한 노화를 겪어 더 이상 젊은이 역할은 기대할 수 없게 됐지만, 여전히 자기 실제 나이보다 젊은 역할을 맡는 데는 익숙한 것 같다.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모리스의 아버지, 짐 모리스 시니어 역할을 맡은 브라이언 콕스의 담담한 연기도 인상적이다. 진짜 할아버지가 아니면 못 할 것 같은 할아버지 연기.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마지막 순간 따뜻한 속내를 보여주는 군인 출신다운 연기가 마음에 든다.
# 3 알링턴
영화속 모리스가 사는 곳은 빅 레이크. 영화에서도 빅 레이크 고교의 야구팀으로 나오지만, 모리스는 실제로는 빅 레이크가 있는 지역인 리건 카운티 고교의 야구팀 코치였다. 영화에서 모리스는 빅 리그 승격이 결정된 뒤 아내에게 전화해 “메이저 리그 구단에는 복장 규정이 있다”며 한 번도 입지 않은 재킷을 다음날 텍사스 주 알링턴의 경기장까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메이저 리그 입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빅 레이크부터 알링턴까지는 자동차로 5시간 이상 떨어져 있다. 5시간 운전이라면 좀 더 극적이었겠지만, 실제 모리스의 집(엄밀하게는 모리스의 아내 로리와 세 자녀가 살던 집)이 있던 샌 안젤로는 알링턴에서 3시간 반 거리다. 로리가 옷을 가져다줬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로리가 그의 경기를 보러 세 아이를 태우고 3시간 반을 운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 때를 회상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는(‘야구팬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에 나온다고) 이야기. 영화에서는 로리 뿐 아니라 동네 주민들이 대거 모리스의 데뷔전을 보러 경기장까지 응원가는 것으로 나온다.
오늘 여행 / 세인트 피터스버그 St. Petersburg, FL
모리스가 데뷔한 메이저리그 팀은 템파베이 데블 레이즈(Devil Rays). 1998년 메이저 리그에 편입된 비교적 신생 팀이다. 지금은 한국 선수 최지만이 뛰어서 잘 알려진 팀. 2008년 시즌부터 데블을 빼고 레이스로 이름을 바꿨다. 이 팀의 연고지가 세인트 피터스버그다.
모리스가 입단한 1999년 시즌은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하위권에 맴돌던 시기이고, 여기저기 선수를 구하러 다니던 때다. 레이즈가 조금 더 강팀이었다면 모리스가 메이저리거로 콜업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오래전 데블 레이즈 시절의 홈 구장을 구경한 적이 있다. 기념품도 샀었다.
레이즈는 플로리다 세인트 피터스버그를 홈으로 하는 팀.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철자가 같다. 인근 도시 템파와 묶어 이 지역을 템파베이라고 부른다. 플로리다에는 Naples(나폴리), Florence(피렌체)처럼 유럽의 아름다운 고도(古都)의 이름을 딴 도시가 많다. 문화 유적이나 경치는 비교할 바 아니지만, 날씨만큼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보다 좋지 않을까 싶다.
기억에 남았던 곳은 끊어진 다리 낚시터. 배와 충돌하는 사고로 한 가운데가 끊어져버린 다리를 시민을 위한 바다 낚시터로 활용한 구조물이다. 가성비로 따지면 최저 수준의 피싱 피어인 셈인데, 우리 같으면 서둘러 덮어버렸을 과오를, 스스로 잊지 않고 경계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 같아 인상 깊었다. 낚시의 재미는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