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7일 토요일

'쌀딩크' 박항서

‘쌀딩크’ 박항서, 끝나지 않은 기적

  선수 때부터 머리숱이 적었다. 대머리 미드필더의 원조는 프랑스가 아니라 한국에 있었다. 지네딘 지단이 아니라 박항서다. 미드필더가 링커로 불리던 시절, 팬들은 악의(惡意)없이 그를 ‘대머리 링커’로 불렀다. 단신(1m66)의 약점을 부지런한 몸놀림으로 극복해 국가대표로도 뛰었다. 1988년 은퇴 뒤 한 동안 잊혀졌던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폴란드 전 골을 넣은 황선홍이 달려와 코치인 그를 끌어 않은 명장면 때문이다.

  ▷감독 인생은 화려하지 않았다.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국가대표 감독직을 물려받았지만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동메달에 그쳤다. 프로 감독으로 1부 리그 우승도 없었다. 급기야 치고 올라오는 젊은 후배들에 밀려 몇 년간 실업자로 살기도 했다. 국내 3부 리그격인 창원시청을 지도할 때 베트남 축구협회와 인연이 닿았다. 지난해 10월 새 도전에 나섰다.

  ▷축구는 잘하지 못해도 그 열기만큼은 뜨거운 베트남 국민들은 한국의 3부 리그 출신 대표팀 감독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 전까지 쓰던 포백(4명 수비) 시스템을 쓰리 백으로 바꾸자 갑작스런 전술 변화에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그는 조직력과 기동력을 극대화한 이 전술로 보란 듯 23일 베트남을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 챔피언십 결승에 진출시켰다. 베트남 축구 사상 최고 성적이다. 2002년 한국의 광희가 베트남에서 재현됐다. 박 감독은 ‘베트남의 히딩크’라는 새 별명을 얻었다. 베트남 주요 산물인 쌀을 빗댄 ‘쌀딩크’라는 별명도 생겼다.

  ▷박 감독은 선전(善戰)의 원동력으로 베트남 선수들의 강한 정신력을 꼽았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 중국에도 당당하게 맞선 나라가 베트남이다. 최근 급속한 경제성장의 배경도 의지와 근면이다. 한국은 베트남에 가장 많이 투자한 나라고 베트남은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동남아 국가다. 돈독해지는 한국과 베트남 관계에 박 감독의 ‘매직’이 힘을 더했다. 베트남은 27일 우즈베키스탄과 결승전을 치른다. 기적은 끝나지 않았다. 2002년 히딩크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박 감독도 아직은 배가 고프다. (180124)

2018년 1월 22일 월요일

테니스史 새로 쓴 정현

테니스史 새로 쓴 정현

  여섯 살 소년은 유난히 눈을 자주 깜빡였다. TV를 보면서도 눈을 찡그렸다. 걱정이 된 부모가 정현의 손을 끌고 안과를 찾았다. 검진 결과 약시. 야외활동을 하면서 녹색을 많이 보는 것이 좋다는 의사의 권유에 부모는 소년에게 테니스 라켓을 건넸다. 보기 드문 ‘안경잡이’ 테니스 선수 정현이 운동을 시작한 계기다. 테니스 지도자인 아버지의 핏줄까지 물려받은 정현은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었다.

 ▷정현의 장점은 빠른 공을 눈으로 쫓아 반응하는 동체시력(動體視力)이다. 역설적이지만 정현의 동체시력을 키운 것은 약시다. “시력이 좋지 않아 사물을 볼 때 보통 사람보다 더 집중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동체시력이 발달했다”는 것이 정현의 어머니 김영미 씨의 설명이다. 여기에 약점으로 지적됐던 포핸드와 서브까지 보완해 괄목상대할 성장을 이뤄냈다.

  ▷정현이 만 11세 되던 2007년, 이형택이 2000년에 이어 두 번째로 US오픈 테니스 16강에 진출했다. 이런 그의 활약을 보고 자란 ‘이형택 키드’ 정현이 기어이 일을 냈다. 정현은 22일 호주 오픈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대회 8강에 진출했다. 16강 상대는 정현 스스로 ‘우상’이라고 부른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세계랭킹 14위). 무려 223주간 세계랭킹 1위 자리를 지켰던 강자다. 정현은 이날 자신의 두 우상을 한꺼번에 넘어섰다.

 ▷어린 선수들은 우상을 바라보며 동기를 얻는다. 박세리의 영향을 받은 박인비, 신지애, 최나연은 이제 다음 세대 골퍼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세리 키즈’를 넘어 ‘인비 키즈’라는 말도 나왔다. 과거 어린 투수들이 선호하는 등번호는 에이스를 상징하는 1번이었지만, 메이저리거 박찬호 등장 이후 61번으로 바뀌었다. 한국 여자 피겨스케이트 1인자인 유영(14)은 비록 나이제한에 걸려 평창겨울올림픽은 출전하지 못하지만 4년 뒤 베이징 대회를 준비하는 ‘연아 키드’다. 테니스계에서도 언젠가 ‘정현 키즈’가 두각을 나타낼 날이 오겠지만 그 보다 먼저 정현이 승승장구해 ‘테니스 불모지’ 한국에서 역사를 계속 써갔으면 한다.
(180122)

중국식 규제

중국식 가상화폐 규제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높아졌고, 바다는 작은 물줄기라도 가리지 않았기에 깊어졌다.”(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진(秦)의 재상 이사가 진왕 영정(훗날 시황제)에게 올린 ‘간축객서(諫逐客書)’는 외국 출신 관리를 내쫓는 ‘축객령’을 거둬들이고 문물과 인재를 두루 포용하라는 내용이다. 이를 받아들인 진왕은 개방·개혁 정책으로 천하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하지만 통일이 되자 반대 목소리를 근절한다며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저질렀다.

 ▷역사는 현재의 반영이다. 이전에도 개방과 규제를 병행하는 정책의 뿌리는 오래됐다. 중국은 신사업 규제를 풀어 빠른 시간에 안정된 스타트 업 창업 생태계를 구축했다. 한국이 최근에야 집중 육성하겠다는 드론은 이미 중국이 세계 시장을 장악한 분야다. 기업가치 59조 원이 넘는 디디추싱(滴滴出行)은 한국에서는 아예 시작도 못하는 차량공유 서비스 회사다. 사업은 허용하되 문제가 생기면 규제한다는 ‘사후규제’가 정책의 원칙이다.

 ▷중국은 다양한 신사업에 대해 관대하지만, 체제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분야는 강력히 통제한다. 일부 해외사이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접속을 막는 인터넷검열 ‘만리방화벽(The Great Firewall)’도 명분은 ‘유해사이트 차단’이지만, 실제로는 온라인상의 체제위협 소지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 이 방화벽을 피해 해외사이트에 접속하는 프로그램을 판매한 사업자가 징역 5년 6개월 중형을 선고 받았다.

 ▷중국이 지난해 9월 가상화폐 거래소를 폐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의 통화정책과 조세권, 위안화 해외반출 금지 등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폐쇄된 중국거래소들이 개인간거래(P2P) 사이트를 열어 거래를 계속하자 중국은 15일 P2P사이트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까지 차단할 계획을 밝혔다.

 ▷중국의 초강력 규제 방침에 가상화폐 국제시세가 급락했다. 비트코인은 17일 하루 만에 28%나 떨어졌다. 김동연 부총리가 16일 “거래소 폐쇄 옵션은 살아있다”고 말한 것도 국내는 물론, 국제시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상화폐의 미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그 기반기술인 블록체인의 무한한 발전가능성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의견이 일치한다. 가상화폐를 제도권으로 흡수해 혁신 기술의 싹을 틔우려고 하기보다 강력한 통제 방침을 내비친 김 부총리의 발언은 그래서 씁쓸하다. ‘중국식 규제개혁’을 본받으라고 했더니 ‘중국식 규제’만 배운 것 같다.(180117)

작심삼일

새해결심과 작심삼일

  페이스북을 통해 1월 한 달 동안 금주(禁酒)한다는 ‘드라이 재뉴어리(Dry January)’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연중 한 달만이라도 간을 쉬게 해주자는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를 공식적 캠페인으로 발전시킨 것은 영국 음주 문제 예방 단체 ‘Alcohol Concern’이다. 이 단체 소속 에밀리 로빈슨이 2011년 하프 마라톤 출전을 위해 ‘1월 금주’를 실천했던 경험과 효과를 떠올리며 이듬해 캠페인을 시작했다.

  ▷건강에 관심이 있다면 지난해 뉴욕타임스 건강섹션에서 가장 많이 읽힌 ‘나이 드는 사람을 위한 운동법’ 기사를 참조하는 것도 좋겠다. 나이가 들면 개구리모양 팔다리가 가늘어지고 근육이 힘없이 빠져버리는데 자전거타기같은 운동을 4분한 뒤 3분 쉬는 것을 3차례 이상 반복하는 ‘인터벌 트레이닝’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내용이다. 실험집단과 비교한 결과 적당한 운동 또는 웨이트 트레이닝보다 유전자 활동 변화 측면에서 훨씬 나았다는 것. 특히 나이 들수록 격렬한 운동이 노화세포를 ‘교정’한다는 결과가 눈에 띈다.

  ▷금주와 운동은 다이어트, 금연과 함께 새해 결심의 단골손님이다. 공통 키워드는 건강이다. 예전에는 금연, 금주의 비중이 높았지만 점차 다이어트와 운동에 순위가 밀리고 있다. 취업포털 사이트 잡코리아가 조사한 설문조사에서 직장인들의 61%가 다이어트를, 이어 32%가 운동을 ‘단골 새해계획’으로 꼽았다. 하지만 응답자 77%가 석 달 내 새해 계획이 무너진다고 답했다. 1월 안에 실패한다는 응답도 27%나 됐다.

 ▷작심삼일의 이유로 미국 노스이스턴대 심리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디스테노 박사는 “미래의 만족보다 현재의 즐거움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자제하려는 의지가 오히려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이다. 그는 이 스트레스를 풀 해결 방법으로 이성이 아니라 감사와 연민, 자부심 같은 ‘감정’을 제시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것, 그리고 내가 달성한 소박한 성과를 자랑하는 것이 새해 결심 성공법이라니 뜻밖에 쉽지 않은가.  (18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