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소년은 유난히 눈을 자주 깜빡였다. TV를 보면서도 눈을 찡그렸다. 걱정이 된 부모가 정현의 손을 끌고 안과를 찾았다. 검진 결과 약시. 야외활동을 하면서 녹색을 많이 보는 것이 좋다는 의사의 권유에 부모는 소년에게 테니스 라켓을 건넸다. 보기 드문 ‘안경잡이’ 테니스 선수 정현이 운동을 시작한 계기다. 테니스 지도자인 아버지의 핏줄까지 물려받은 정현은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었다.
▷정현의 장점은 빠른 공을 눈으로 쫓아 반응하는 동체시력(動體視力)이다. 역설적이지만 정현의 동체시력을 키운 것은 약시다. “시력이 좋지 않아 사물을 볼 때 보통 사람보다 더 집중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동체시력이 발달했다”는 것이 정현의 어머니 김영미 씨의 설명이다. 여기에 약점으로 지적됐던 포핸드와 서브까지 보완해 괄목상대할 성장을 이뤄냈다.
▷정현이 만 11세 되던 2007년, 이형택이 2000년에 이어 두 번째로 US오픈 테니스 16강에 진출했다. 이런 그의 활약을 보고 자란 ‘이형택 키드’ 정현이 기어이 일을 냈다. 정현은 22일 호주 오픈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대회 8강에 진출했다. 16강 상대는 정현 스스로 ‘우상’이라고 부른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세계랭킹 14위). 무려 223주간 세계랭킹 1위 자리를 지켰던 강자다. 정현은 이날 자신의 두 우상을 한꺼번에 넘어섰다.
▷어린 선수들은 우상을 바라보며 동기를 얻는다. 박세리의 영향을 받은 박인비, 신지애, 최나연은 이제 다음 세대 골퍼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세리 키즈’를 넘어 ‘인비 키즈’라는 말도 나왔다. 과거 어린 투수들이 선호하는 등번호는 에이스를 상징하는 1번이었지만, 메이저리거 박찬호 등장 이후 61번으로 바뀌었다. 한국 여자 피겨스케이트 1인자인 유영(14)은 비록 나이제한에 걸려 평창겨울올림픽은 출전하지 못하지만 4년 뒤 베이징 대회를 준비하는 ‘연아 키드’다. 테니스계에서도 언젠가 ‘정현 키즈’가 두각을 나타낼 날이 오겠지만 그 보다 먼저 정현이 승승장구해 ‘테니스 불모지’ 한국에서 역사를 계속 써갔으면 한다.
(18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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