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0일 일요일

이색지대(1973)와 웨스트월드(2016) // Monument Valley

- 잡설 : 이색지대(1973)와 웨스트월드(2016)

  영화 ‘이색지대(Westworld·1973)’를 동영상으로 다시 보게 된 것은 HBO의 미드 ‘웨스트월드(Westworld·2016)’ 때문이다. 미드 웨스트월드가 이 영화의 리메이크 작이다.
  영화를 볼 때는 원제가 웨스트월드인 것도 몰랐다. 토요명화인지 명화극장인지, 또는 다른 특선영화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린 시절 TV에서 이 영화를 매우 인상 깊게 본 기억만은 또렷하다. 무뚝뚝한 살인 로봇으로 나오는 율 브린너의 연기는 어린 시각에도 충격적이었다.
  다시 봐도 느낌은 처음 봤을 때와 비슷했다. 인간과 똑 같은 로봇이 등장해 온갖 모험과 향응을 제공하는 휴양지, 그곳을 찾는 인간들과 어느 순간 인간을 배신하는 로봇, 뒤따르는 위기와 공포. 40여 년 전이지만, 지금 그대로 영화에 적용한다고 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대단한 상상력이다. 미드의 소재로 ‘재활용’되더라도 손색없는 상상력이다. 미드를 보기 전까지는 이 영화의 각본과 감독이 마이클 클라이튼이라는 것을 몰랐다. 생각해보니 이 영화의 주제는 훗날 ‘쥬라기 공원(1993)’을 통해 재현된다. 마이클 클라이튼은 쥬라기 공원의 원작자이며 각본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그리 높지 않다. 어린 시절엔 매우 흥미진진하게 봤지만, 다시 보니 아무리 오래된 영화라고 해도 허술한 구석이 너무 많다. 하긴 영화의 완성도라는 게 기술의 발전과는 크게 관련은 없는 것이지만. 어쨌든 복선은 있지만 로봇이 오작동하는 계기를 설명하는 과정은 부족하다. 딱히 로봇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죽이는 것 같지도 않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주제로 한 영화치고는 긴박감도 모자란다. 그나마 율 브린너의 카리스마가 영화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여전히 멋지다.
  이 영화가 후에 많은 영화들에 영향을 준 사실은 분명하지만, 영화 자체는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쥬라기 공원의 감독이 마이클 클라이튼이 아닌 스티븐 스필버그인 것은 매우 다행이다.)
  하나 더, 당시 ‘최첨단’으로 여겨졌던 영화의 장면들(로봇 율 브린너의 눈에 비친 픽셀 시각이나 복잡해 보이는 로봇 내부의 회로 같은)은 지금 보니 매우 허접하게 느껴진다. 최첨단 로봇을 수리하는데 시계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장면에서는 왠지 실소가 나왔다. 그 시절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지만.




  미드 ‘웨스트월드 시즌 1’의 에피소드 10회를 거의 단숨(이라고는 해도 며칠 동안)에 독파했다. 소재는 같다. 인공지능 로봇이 모험과 향응을 제공하는 휴양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최첨단 놀이터에 기꺼이 돈을 쏟아 붓는 부자들. 시각적으로 더 발전하고, 상상력이 더 구체화됐을 뿐이다. 그것이 훨씬 재미를 키우는 요소이기는 했지만.
  그런데도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과정은 달랐다. 드라마는, 암묵적으로, 시청자들이 이미 영화의 줄거리를 알고 있다는 전제를 두고 출발한다. 리메이크 드라마의 장점이자 한계다. 그 경우 선택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로봇의 배신을 줄거리의 앞쪽으로 끌어당기고 후반부는  위기 속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인간들의 분투기를 박진감 있게 표현하는 것. 다른 하나는, 로봇이 왜, 그리고 어떻게 배신하는 지의 과정을 꼼꼼히 설명해 개연성을 더하는 것. 전자는 영화에서 시도했던 것이고, 후자는 영화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드라마는 후자를 택했다. 로봇이 인간을 ‘본격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10화의 말미다. 시즌 2에 대한 ‘밑밥’이겠지만, 1개 시즌만으로도 충분히 완성도가 있다. (시즌 2가 기다려지기는 하는데, 이게 2018년 가을이나 돼야 방영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그 때 쯤 이면 이 드라마에 대해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한 줄로 평을 하자면, 이야기는 정교하고 연출은 탄탄하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연기자들의 연기력이다. HBO가 심혈을 기울인 드라마인 만큼 캐스팅이 화려하다. 그리고 화려한 그들이 이름값을 한다.
  미국만큼 철저하게 시청률을 의식하고 드라마를 만드는 나라도 없을 것이라고 본다면, 드라마가 제시하는 철학적 성찰이나 인간 사이의 갈등 따위는 딱 보통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간혹 현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그 점이 지나쳐 채널을 돌리게 하지 않는다. 이런 걸 보면, 이제는 단순히 영화나 드라마가 천재 한 명의 영감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드라마(적어도 시즌 1)를 꿰뚫는 주제는 ‘로봇 디스토피아’에 대한 공포다. 그리고 그 공포를 유도하는 것은 인간이다. 자의(인 줄 알았으나 결국 누군가의 의도 때문에)로 ‘각성’하고 인간을 공격하는 살롱 여주인 메이브의 변화를 통해 공포가 점증적으로 표현된다. (로봇 디스토피아 또는 인공지능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는 몇 가지가 있지만, 이 드라마의 원작 영화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례다. ‘에이리언:커버넌트(2017)’에서 인간을 숙주로 하는 외계 생명체보다 더 무서운 것이 AI 로봇의 각성이다. AI로봇 데이브는 스스로 생명체의 창조자가 되기로 하고 인간을 외계 생명체의 먹이로 던진다. 로봇 또는 컴퓨터의 반란을 다룬 영화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에서 시작한다. ‘터미네이터(1984)’가 백미다. ‘매트릭스(1999)’에서 상상력이 더 발전했고 ‘아이, 로봇(2004)’은 영화적 흥미에 초점을 맞췄다. ‘엑스 마키나(2015)’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로봇의 부작용을 다룬다.)

  드라마를 보면서 몇 가지 소소한 재미도 찾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어서 실제 제작자의 의도와 맞는지는 모르겠다.
  우선 배경. 드라마 속 테마파크는 애리조나 주 모뉴먼트 밸리를 그대로 본떴다. 나바호 인디언의 성지로 불리는 모뉴먼트 밸리는 서부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유성영화 시대 서부극의 효시로 불리는 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1939)’를 촬영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AI로봇들을 ‘연출’하는 테마파크 책임자의 이름이 포드(로버트 포드)인 것도 존 포드 감독에 대한 경의 표시가 아닐까 싶다.
  드라마 전개를 이끌면서 궁금증을 끌어내는 악당 로봇의 이름은 와이어트다. 서부 시대 전설적인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의 이름을 땄을 가능성이 크다. ‘오케이목장의 결투(1957)’에서 버트 랭카스터가 맡았던 주인공이 와이어트 어프다. 사후의 전기(傳記)와 영화에서의 묘사 때문에 미국인에게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그의 행적에 대해 ‘명성’과 ‘악명’사이에서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이 드라마가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무는 이름으로 와이어트라는 실제 인물의 이름을 차용한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색지대’에 대한 오마쥬도 나온다. 슬쩍 지나가는 장면에서 언뜻 율 브린너의 실루엣이 등장한다. 얼굴은 뚜렷하지 않지만 검은 옷을 입고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가 영락없이 율브린너다. 율 브린너가 이색지대에서 입고 나왔던 검은 옷은, 그가 ‘황야의 7인(1960)’에서 입고 나왔던 것과 비슷하다. 황야의 7인에서 이색지대, 그리고 웨스트월드까지 오마쥬의 연속인 셈이다.



- 오늘 여행 : Monument Valley, AZ

  유타와 애리조나 접경 지역의 인디언 자치구. 이곳을 방문하기 전부터 미리 예약해서 반드시 The View Hotel 에서 묵으라는 말을 들었다. 이 호텔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호텔이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것도 한 이유지만, 그 보다는 이 호텔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모뉴먼트 밸리의 석양과 야경 때문이다. 오래 전 예약이 아니면 호텔에 묵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쉽지 않다지만, 매일 전화기를 돌리는 노력과 마침 취소된 방이 생긴 행운이 겹친 덕에 예약할 수 있었다. 그 만한 보람이 있었다. 모뉴먼트 밸리 머리 위의 별들은 그 어느 곳에서 본 별보다 아름다웠다.



  석양에 모습을 드러낸 ‘쌍둥이 벙어리장갑(Twin Mittens)’. 몽환적이라는 단어만큼 어울리는 표현이 있을까. 다음날 렌트한 세단으로 도전한 모뉴먼트 밸리 투어. 보통은 SUV나 트럭이 필요하지만 세단으로 둘러보는 관광객들도 많다. 잠시 고운 흙바닥에 바퀴가 빠져 고생하기도 했지만, 이 대자연의 속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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