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3일 수요일

Santa Fe, NM

Santa Fe, NM

#1 빌리 더 키드

  거친 시대에는 엉뚱하게 미화되거나 신화화되는 범죄자들이 있다. 평화로운 시절과는 기준이 다르다. 19세기 말 영국 런던 화이트채플의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는 5명(또는 그 이상)의 매춘부를 살해하고도 단지 붙잡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신비스런 인물로 묘사된다. 잭 더 리퍼는 범죄 현장에 “유대인은 비난받을 일이 없다(The Jewes are the men that will not be blamed for nothing)”는 문구를 남겼다고 하는데, 과감하게 스스로의 자취를 표시하는 범인의 모습에서 대중은 공포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잭 더 리퍼는 이후 연구서와 소설을 포함한 책과 영화, 뮤지컬의 단골 소재로 확대 재생산됐다.
  잭 더 리퍼의 살인 행각(1888년)과 비슷한 시기, 정확히는 11년 뒤 미국 와이오밍에서는 ‘부치 캐시디 와일드 번치(Butch Cassidy’s Wild Bunch)’ 라는 무법자 집단이 활개 치기 시작했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1969)’에 나오는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폴 뉴먼이나 로버트 레드포드 같은 매력적인 남자 배우들, 게다가 그들 못지않게 매력적인 여배우 캐서린 로스와의 로맨스까지 더해진 영화로만 보면 매우 낭만적인 존재들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강도 행각을 일삼던 악질 범죄자들이었다고 한다. 이들 역시 미화돼 재생산된 경우다.
  악당의 미화와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이 악당을 빼놓는다면 섭섭할 수도 있겠다. 잭 더 리퍼보다 10년쯤 먼저 활동했던, 하지만 살인 건수로만 따지면 잭 더 리퍼를 훨씬 능가하는 서부시대 무법자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 역시 전설로 남은 악당이다. 뉴욕에서 태어나 뉴멕시코에서 생을 마감했다. 헨리 맥카티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스스로를 윌리엄 H. 보니라는 이름으로 부른,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빌리 더 키드’로 더 유명한 이 총잡이는 죽은 뒤 그림과 시, 책, 음악,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통해 부활했다. 이미 1930년에 ‘빌리 더 키드’라는 영화가 나왔고, 1941년에는 ‘산타페의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 in Santa Fe)’라는 영화도 나왔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가 영화 ‘영 건(Young Gus·1988)’에서 빌리 더 키드 역할을 맡았다. 이런 것만 봐도 미국인들이 얼마나 빌리 더 키드를 좋아하는 지 알 수 있다.
  신화가 되기 위해서는 극적인 사건이 필요하다. 잭 더 리퍼의 편지나 부치 캐시디 일당의 열차 강도처럼. 빌리 더 키드의 명성을 높여준 것은 링컨 카운티 전투다. 영화 ‘영 건’은 이 전투를 소재로 만들었다. 뉴멕시코 지역 상권을 두고 벌어진 신구 세력의 다툼인데, 빌리 더 키드는 열세인 쪽에 서서 뛰어난 총격 실력을 발휘하며 일약 영웅으로 부상했다.
  굳이 여기서 빌리 더 키드의 나머지 인생을 옮겨 적지 않더라도, 그가 뛰어난 총잡이면서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21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21명 이상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이 무법자를 굳이 후세가 옹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부 개척시대의 향수를 간직한 미국인들에게 ‘빌리 더 키드’는 범죄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 같다.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호기심을 자극할 대상임은 충분하다. 이런 점을 노리고 뉴멕시코주는 빌리 더 키드를 관광 상품으로 개발했다. 실제로 빌리 더 키드가 뉴멕시코주에 산 것은 9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긴 나이로 보면 거의 반평생을 산 셈이다. 뉴멕시코주의 주도(州都)가 산타페다.


# 2. 조지아 오키프

  그의 꽃 그림이나 짐승 해골 그림에서 관능미를 찾으려고 했다면, 그의 인생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꽃은 꽃처럼, 뼈는 뼈처럼 그렸으나 꽃 이상, 뼈 이상, 사막 이상의 가치를 표현한 화가. 시대의 발걸음을 신경 쓰지 않았기에 오히려 시대를 앞서간 화가. 오키프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연인이었는지, 아니면 스티글리츠가 오키프의 연인이었는지. 예술의 도시 산타페를 만든 고독한 삶.




# 3. 미야자와 리에

  산타페에서 미야자와 리에를 떠올리는 세대라면 조금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1991년 나온 이 사진집은 엄밀하게는 사진작가인 키신 시노야마의 책이지만, 피사체인 미야자와만 부각됐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 사진집으로 미야자와는 일약 일본을 뛰어넘어 세계적인 화제가 됐지만,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랜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 물론 다카노하나와의 파문 등 여러 사건도 그 중 하나다.
  이제 더 이상 청춘스타가 아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2014)’나 ‘종이달(2015)’을 보면, 엄마 역할, 주부 역할이 그렇게 어울릴 수 없다. 그렇다고 ‘아줌마’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중년 여성은 아니다. 목욕탕집 여주인을 연기해도(행복 목욕탕·2017) 묘한 매력을 주는 중년. ‘산타페’의 분위기가 여전히 조금은 남아 았다. 아도비 건축물과 어울리는 얼굴.




2017년 11월 16일 목요일

독재자 // Verona

독재자

  “미안합니다. 나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누구를 다스리거나 정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찰리 채플린은 그의 첫 유성 영화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1940)’에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독재국가 토매니아의 지도자 힌켈과 똑 닮은 이발사 찰리. 겉모습 때문에 대중에게 힌켈로 오인돼 단상에 오른 찰리는 ‘세계정복을 꿈꾸는 독재자’의 연설과는 동떨어진, 이 유명한 ‘평화 연설’을 한다. 아돌프 히틀러와 비슷한 복장과 제스처, 하지만 되레 평화를 이야기하는 이 장면은 연설을 통해 독일 국민을 사로잡은 독재자 히틀러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대목이다. 일본 극작가 오노 히로유키의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에는 채플린이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자료 영상을 반복해서 보면서 히틀러의 일거수일투족을 연구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 영화는 탁월한 연설로 군중 심리를 사로잡은 뒤 독재자가 된 히틀러를 비판한 것이다. 히틀러라고 독재자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은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하며 대중의 환심을 샀다. 기존 정치 세력은 이런 히틀러를 꼭두각시 총리로 내세워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정권을 잡자 히틀러가 본색을 드러냈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금지하고, 차례로 정적(政敵)을 숙청했다. 입법권과 사법권까지 장악하고는 1934년 전권을 행사하는 총통에 오른다.

▷독재자의 탄생 과정은 대체로 비슷하다. 처음에는 대중의 인기를 얻고 집권하지만 집권 후에는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폭정을 휘두른다. 15일 군부 쿠데타로 37년 권좌에서 쫓겨나 가택 연금된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93)도 비슷하다. 그는 1980년 짐바브웨가 영국에서 독립하기까지 국내외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이끈 독립영웅이었다.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총리가 된 뒤에도 초기에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국민의 인기를 얻었지만, 1987년 무제한 연임이 가능한 6년 대통령제로 헌법을 바꾼 뒤에는 독재자로 돌변했다.

▷무가베는 ‘아프리카의 김일성’으로도 불린다. 독립운동 때부터 북한의 지원을 받은 그는 1980년 방북해 김일성의 ‘유일 독재’와 ‘우상화 정책’을 배웠다. 자신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고 동상을 세우며 김일성 따라하기에 나섰다. 1994년 김일성이 죽자 추모위원회를 꾸렸을 정도로 무가베의 김일성 숭배는 유명하다. 김정일에게는 2010년 야생동물 한 쌍씩을 선물하려다 국제환경단체의 비판에 무산된 적이 있고, 2014년에는 김정은에게 500만 달러를 주고 동상 제작을 의뢰하기도 했다. 나라 경제를 파탄내고서 통치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공통점이다.

▷독재자(dictator)라는 단어는 고대 로마 공화정의 관직 ‘딕타토르(독재관·獨裁官)’에서 유래했다. 로마는 국가 비상사태를 맞으면 전권을 행사하는 독재관을 임명했다. 신속한 결정을 내리기 위한 조치다. 독재관이 내린 결정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마는 현명했다. 비상사태가 해결되면 독재관은 물러났다. 초기 독재관의 임기는 6개월을 넘지 않았고 후기로 가더라도 1년이 최장이었다. 클라우디오 술라는 임기가 없는 독재관을 맡기도 했지만 2년 만에 스스로 물러났다. 공화정 말기 줄리우스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에 올라 이 전통을 깼다가 “황제가 되려 한다”는 비난 속에 암살당했다. (171116)




- 오늘 여행 : Verona

  베로나 방문은 두 차례. 첫 방문과 두 번째 방문 사이에는 14년의 간격이 있다.
  베로나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다른 하나는 야외 오페라다.

  줄리엣은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지만, 베로나에는 ‘줄리엣의 집’ 이라는 관광 명소가 있다. ‘로미오의 집’과 ‘줄리엣의 무덤’도 있다지만 줄리엣의 집만큼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은 아니다. 줄리엣의 집에는 그 유명한 발코니가 있다.
  셰익스피어가 베로나를 방문했다는 기록은 없다. 줄리엣의 유적들도 모두 20세기 초에 베로나시가 ‘지정’한 것이다. 어쩌면 셰익스피어의 명성에 기댄 상술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러브 스토리의 배경은 스스로 살을 붙이고 이야기를 쌓아갔다. 예를 들어 줄리엣 동상의 오른쪽 가슴을 만지면 행운이 생긴다는 전설 따위 들이다.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한 번 만지고 왔다.) 지금은 러브 스토리의 낭만은 사라지고 그저 한번쯤 로미오나 줄리엣이 되보고 싶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간이 됐다.


  베로나는 야외 오페라의 고장이기도 하다. 1세기 초에 만들어진 베로나 아레나에서 매년 야외 오페라 축제가 열린다. 검투사가 목숨을 걸고 상대 검투사와 싸우거나, 맹수를 쓰러뜨리기 위해 몸부림치던 피비린내 나던 장소가 예술의 전당으로 거듭났다. ‘공연장’ 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를 게 없지만, 여흥의 수단으로 보면 천지차이다.
  타원형인 베로나 아레나는 긴 쪽 길이가 140m인 축구장 크기의 대형 건축물. 지어진 지 2000년이 됐지만 여전히 끄떡없이 한번에 관객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십여 년 전에는 운이 좋아 이 야외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당시 감상한 오페라는 아이다였는데,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감독인 프랑코 제피렐리의 연출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감독이 연출한 오페라를 봤던 여운은 지금도 묘하게 남아있다.
  두 번째 방문은 오래전 가봤던 명소들을 스치듯 지나가며 추억을 곱씹을 기회였다. 수백 년 동안 변하지 않은 거리가 불과 십여 년 만에 변할 리 없었다.







2017년 10월 30일 월요일

바비큐 小考

  “교수님이 젊은 시절 텍사스에서 살아서 바비큐도 텍사스 식으로 주문했대요. 노스캐롤라이나식과는 다를 겁니다.”
  한 미국인 교수 집에 초대를 받아 갔을 때 들은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엄밀하게는 말은 알아들었지만 뜻을 몰랐다. 바비큐면 바비큐지 텍사스식은 뭐고, 캐롤라이나식은 뭐란 말인가. 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바비큐는 어느 동네 방식이었던 걸까.
  그런데, 미국 주 하나 정도 크기(또는 그 보다 작은)인 한국에도 전라도식 김치, 경상도식 김치가 구분되는 마당에, 넓은 미국에서 지역에 따른 바비큐 구분이 없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터였다.

  불에 고기를 굽는 바비큐는 사실 고기를 먹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회자(膾炙)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옛날에는 날고기 아니면 구운 고기였다. 찌거나 삶는 방식도 있겠지만, 역시 고기는 굽는 게 가장 사람들의 입맛을 자극했던 것 같다. 편한데다 맛도 있다. 카우보이들이 많은 미국에서 발달한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런 미국이라면, 한국의 고유한 요리로 주장하는 ‘불고기’도 결국 ‘특이한 바비큐’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듯 하다. 식탁에서 직접 구워먹는 독특한 문화와 미리 양념을 재워두는 정성도, 바비큐의 배리에이션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다.

 돼지고기 바비큐라면 역시 슬라이스 보다는 잘게 찢은 풀드 포크(pulled pork)가 제 맛이다. 찾아본 바로는 멤피스(테네시)와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캔자스시티(미주리), 센트럴 텍사스, 이스트 텍사스, 앨러배마 등이 저마다 독특한 바비큐를 자랑한다. 노스캐롤라이나 식에도 이스트 스타일과 렉싱턴 스타일이 있다고 한다. 맛을 글로 표현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것이 있을까. 여하튼 설명을 죽 보니, 주로 먹었던 것은 새콤한 식초향이 감도는 노스캐롤라이나 식이었던 것 같다. 노스캐롤라이나는 ‘바비큐 협회(NC Barbecue Society)’에서 선정한 ‘바비큐 트레일(Historic Barbecue Trail)’이 있을 정도로 바비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고장이다.

  고기 자체를 중요시하는 텍사스식이나 노스캐롤라이나 스타일에 머스터드소스를 곁들이는 사우스캐롤라이나식도 궁금하긴 하다. 절충형도 있다. 앨라배마식은 텍사스와 노스캐롤라이나식의 중간쯤이라고 한다. 마요네즈와 식초를 섞은 소스로 만든 풀드 포크를 햄버거 빵에 넣어 먹는 샌드위치라는데, 버밍엄을 지나며 일부러 ‘바비큐 맛집’을 찾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말 허름한 가게. 여행안내 책자가 아니었으면 결코 지나가다 들를만한 외형은 아니었다. 반신반의하고 들어갔다 두 번 놀랐다. 첫째, 생각보다 손님이 많은데 놀랐고 둘째, 맛은 결코 ‘허름하지’ 않았던 데 놀랐다.

  청계천 야시장 푸드트럭에서 오랜만에 풀드 포크 바비큐를 맛봤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간 것이다. 미국 요리사가 만들어준다는 바비큐가 TV에 나온 뒤 인터넷에서도 유명해졌다. 예전 버밍엄의 샌드위치 맛을 기대하고 찾아갔지만, 약간 느낌이 달랐다. 이건 도대체 어느 동네 식일까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우리 입맛에 맞춘 ‘서울식’일 가능성이 높으니….


2017년 9월 19일 화요일

'로켓맨' 김정은

‘로켓맨’ 김정은

▷구효서 작가의 단편소설 ‘별명의 달인’에는 중학생 시절 친구들의 특징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 별명을 붙이는 ‘라즈니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라즈니시는 별명에 대해 친구들에게 따로 설명을 하지 않지만, 다른 친구들은 모두 그 의미를 단번에 이해했다. 토를 달지도 않았다. 그 만큼 절묘한 별명 짓기의 달인이랄까. 작가는 라즈니시가 ‘상대를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알았기 때문에’ 별명을 잘 지었다고 설명한다. 소설 속에는 ‘구절판 개고기’나 ‘개발길질’, ‘나무젓가락1’, ‘나무젓가락2’ 같은 독특한 별명이 나온다.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작명’한 것이거나, 어쩌면 작가의 학창 시절 실제로 주변에서 불렸던 친구들의 별명일지도 모르겠다.

▷온갖 별명이 난무하는 학교만큼 별명이 많은 곳이 정치계다. 정치인에게 별명은 양날의 칼 같은 존재다. 대중에게 인지도를 높일 수도 있고 친근하게 접근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도 있어서다. 대부분 정치인은 긍정적, 부정적 의미의 별명 한 두 개씩은 갖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지자들에게 ‘이니’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답답하다는 의미에서 ‘고구마’나 ‘고답이’라고 불렸던 것이 한 사례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한 때 잘 나갈 때는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지만, 당선된 후에는 ‘수첩공주’나 ‘불통공주’가 별명이었다. 정치인 별명은 대부분 대중이나 언론이 붙여준 것이다.

▷다른 사람의 별명을 직접 만드는 정치인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라즈니시 같은 ‘별명의 달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적(政敵)들에게 별명을 붙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성격이나 외형적 특징을 잡은 별명이 아니라, 깎아내리기 위한 별명이라는 점이 라즈니시와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공화당 경선 토론에서 마코 루비오 플로리다주 상원의원을 ‘꼬마 마코(Little Marco)’라고 불렀다. 지명도가 낮다는 것을 비꼰 것이다. 테드 크루즈 텍사스주 상원의원은 ‘거짓말쟁이 테드(Lyin’ Ted)’라는 별명을 붙였고,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는 ‘비뚤어진 힐러리(Crooked Hillary)’ ‘썩은 힐러리(Rotten Hillary)’라는 별명으로 이메일 스캔들 등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공격했다.

▷이런 트럼프가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을 ‘로켓맨(Rocket Man)’으로 불렀다.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한 트럼프 대통령은 17일(현지 시간) 트위터에 “문 대통령에게 ‘로켓맨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봤다”고 적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를 두고 “단지 알파벳 아홉 글자로 대통령은 김정은을 조롱하고 북한 정권의 미사일 무기를 하찮게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엘튼 존의 유명한 노래를 떠올리게도 한다”고 했다. 로켓맨은 엘튼 존이 1972년 발표한 노래 제목이다. 우주에서 지구와 가족을 그리워하는 우주비행사(로켓맨)의 독백이 가사 내용이다.

▷트럼프의 트윗 이후 미국 소셜네트워크사이트(SNS)에서는 해석이 분분했다. 가사 중 ‘혼자서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Burnin’ out this fuse, up here alone)’는 부분이 김정은을 빗댄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화성은 애 키우기 적당한 곳이 아니야(Mars ain't the kind of place to raise your kids)’라는 구절을 ‘북한은 애 키우기 적당한 곳이 아니야(N.K. ain't the kind of place to raise your kids)’라고 해석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가 엘튼 존의 명곡을 김정은과 비교해 망쳐버렸다’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나온 것을 보면, 이번에는 별명을 썩 잘 붙인 것 같지는 않다. (170918)


2017년 9월 14일 목요일

NFL의 한국인 키커

  미국 프로미식축구인 NFL에도 외국인(미국 기준으로 외국인) 또는 외국 태생 선수들이 없지는 않다. 지금은 외국인 선수가 50명 정도가 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계(또는 출생)도 몇 명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선수를 꼽으라면 ‘슈퍼볼 MVP’ 하인즈 워드일게다. 그 외에도 대학에서는 주목받았으나 단 한 시즌만에 프로 경력을 마감(확실치는 않음)한 존 리라는 ‘비운의 키커’가 있고, 또 몇 명의 한국계 선수들이 더 있다. 하인즈 워드와 존 리는 한국 출생이기는 했지만 한국 국적은 아니었다.

  올 시즌 처음 NFL에 한국인 선수가 데뷔했다. NFL 중계를 볼 기회가 많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관심을 갖고 볼 만 일이 생겼다. 생겼다. LA 차저스의 구영회라는 키커인데, 첫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니 마지막 필드골 실패(실수는 수비 라인이 한 것)가 옥의 티지만, 꽤 안정적으로 찬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저스는 원래 LA에서 출발했지만 오랫동안 샌 디에고를 연고지로 사용하다 다시 LA로 돌아갔다.

  원래 미식축구라는 게 미국 외에서는 인기가 그리 높지 않아서 야구나 축구처럼 외국인 선수가 많지 않다. 주요 미국 프로스포츠 가운데 외국인(또는 외국 태생) 선수 비율이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그래도 간혹 두각을 나타내는 외국인(또는 외국 태생) 선수들이 있다. 럭비 선수 출신을 제외하면, 특히 유명한 선수들은 스페셜 팀, 그 중에서도 키커가 눈에 띈다.  아마도 축구나 격투기처럼 다른 종목에서 ‘차는 훈련’을 해 온 선수들이 많아서가 아닐까 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사실 외국 태생 키커가 많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특이한 것은 역대 가장 유명한 두 명의 키커가 모두 외국 태생이라는 점이다. 덴마크 출신인 Morten Andersen(모르텐 안데르센이라고 읽나)과 남아공 출신 개리 앤더슨(이라고 읽을 것 같음, Gary Anderson)인데, 나란히 역대 스코어 랭킹 1, 2위다. 찾아보니 Andersen이 2544점, Anderson이 2434점을 올렸다. 둘 다 선수생활을 오래했는데, Andersen이 25년, Anderson이 18년을 프로로 뛰었다. 아마도 자기 관리만 잘 하면, 다른 포지션과 달리 외부 충격이 적은 포지션 성격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둘 다 1982년에 데뷔했는데, 선수 생활을 오래 해 준 덕에, 경기를 봤던 기억이 가물가물 난다. 여하튼 한국인 구영회도 언젠가 이런 외국인 선수들 사이에 이름을 올렸으면 하는데, 존 리라는 어정쩡한 선례가 있으므로 어찌될지는 두고봐야할 일이다. 존 리가 뛰었을 때는 너무 예전이어서 플레이는 기억나지 않고 신문에서 읽은 기억은 난다.

  참, 하나 더. 좀 다른 이야기인데, 여기서 말하는 키커는 플레이스키커를 의미한다. 누가(홀더) 잡아준 공을 차는 것. 스스로 공을 들고 차는 펀터(Punter)와는 구분되는데, 키커가 공을 ‘깔끔하게’ 차야한다면, 펀터는 공을 ‘지저분하게’ 그리고 ‘적당히’ 차야 잘 차는 것이다. 무조건 멀리 차는 것이 아니라 엔드라인 끝까지만 가야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제대로 잡지 못하게 차는 것도 중요하고.

  이처럼 차는 선수도 구분될 정도로 분업화가 뚜렷한 것이 미식축구인데, 공을 차는 선수를 위해 뒤로 공을 던져주는 선수도 따로 포지션이 있다. 롱 스내퍼라는 포지션이다. 평소 공격을 할 때는 센터가 쿼터백에게 가랑이 사이로 짧게 스냅을 해주고 블로킹에 들어가는데 비해, 롱 스내퍼는 키커에게 멀리 던져주는(그래서 롱 스내퍼) 것이 주요 역할이다. 롱 스내퍼는 필드골이나 펀트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별로 티가 안 나는 포지션.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아마도 가장 유명하기 때문에) 롱 스내퍼는 존 도렌보스일텐데, 그건 플레이 때문이 아니라 필라델피아 이글스 선수 시절 아메리카스 갓 탤런트에 마술사로 출연해 결승까지 진출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뉴올리언스 세인츠로 이적한 듯.

2017년 8월 30일 수요일

'공짜 점심'과 '미끼 상품' // New Orleans, LA

- 잡설 : ‘공짜 점심’과 ‘미끼 상품’

  공짜 점심(Free Lunch)은 없다. 당장은 공짜라고 생각되지만, 실은 대가가 있다. 그것도 공짜로 먹은 점심보다 더 한 대가를 치러야한다.
  공짜 점심은 19세기 미국(특별히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유래됐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사실 공짜 점심이 아니라 술에 끼워 파는 메뉴였다. 당시 식당들이 노동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한 방편이었는데, 점심을 공짜로 주는 대신 술을 함께 팔았다. 적당한 안주가 곁들여진 술 한 잔은 또 다른 한 잔을 끌어드리는 법이어서, 식당 주인으로서는 공짜 점심의 비용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지출이 늘어났다. 공짜로 점심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점심이 곁들여진 비싼 주안상을 사는 셈이었다.
  여기서 유래된 공짜 점심이란 말은 이제 여러 분야에서 쓰이고 있다. 금융 상품의 수익과 리스크를 논하는데도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표현을 쓴다.
  공짜 점심은 미끼 상품(Loss Leader)과는 좀 다르다. 공짜 점심이 끼워 팔기의 현혹이라면, 미끼 상품은 호객의 현혹이다. 보통 가격보다 훨씬 싼 가격을 책정한 상품들이다. 일단 자기 상점으로 손님을 끌어오려는 의도에서 원가보다 싸게 판매하는 상품들이다. 한정 세일인 경우가 많다.
  공짜 점심과 달리 미끼 상품은, 그 자체만 산다고 해서 상점 주인이 뭐라고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 심리가 묘해서, 미끼 상품에 혹해 일단 상점에 들어가고 나면, 뭐든지 사고 싶어진다. 결과로는 공짜 점심이나 미끼 상품이나 다를 바 없다.

  요즘 하도 공짜 점심이나 미끼 상품 같은 일이 많아 그적거린 잡설.




- 오늘 여행 : New Orleans, LA

  


과연 단어 몇 개로 설명이 될는지.

  재즈, 낭만, 남부의 맛, 천천히, 쉽게, Big Easy, 검보, 포보이, 크로피쉬, 크랩, 케이준,  베네와 카페오레, 프랜치쿼터, 버본 스트리트, 마르디그라스, 그리고 Mississippi. 










뉴올리언스 여행때 참고했던 소개글



2017년 8월 20일 일요일

이색지대(1973)와 웨스트월드(2016) // Monument Valley

- 잡설 : 이색지대(1973)와 웨스트월드(2016)

  영화 ‘이색지대(Westworld·1973)’를 동영상으로 다시 보게 된 것은 HBO의 미드 ‘웨스트월드(Westworld·2016)’ 때문이다. 미드 웨스트월드가 이 영화의 리메이크 작이다.
  영화를 볼 때는 원제가 웨스트월드인 것도 몰랐다. 토요명화인지 명화극장인지, 또는 다른 특선영화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린 시절 TV에서 이 영화를 매우 인상 깊게 본 기억만은 또렷하다. 무뚝뚝한 살인 로봇으로 나오는 율 브린너의 연기는 어린 시각에도 충격적이었다.
  다시 봐도 느낌은 처음 봤을 때와 비슷했다. 인간과 똑 같은 로봇이 등장해 온갖 모험과 향응을 제공하는 휴양지, 그곳을 찾는 인간들과 어느 순간 인간을 배신하는 로봇, 뒤따르는 위기와 공포. 40여 년 전이지만, 지금 그대로 영화에 적용한다고 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대단한 상상력이다. 미드의 소재로 ‘재활용’되더라도 손색없는 상상력이다. 미드를 보기 전까지는 이 영화의 각본과 감독이 마이클 클라이튼이라는 것을 몰랐다. 생각해보니 이 영화의 주제는 훗날 ‘쥬라기 공원(1993)’을 통해 재현된다. 마이클 클라이튼은 쥬라기 공원의 원작자이며 각본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그리 높지 않다. 어린 시절엔 매우 흥미진진하게 봤지만, 다시 보니 아무리 오래된 영화라고 해도 허술한 구석이 너무 많다. 하긴 영화의 완성도라는 게 기술의 발전과는 크게 관련은 없는 것이지만. 어쨌든 복선은 있지만 로봇이 오작동하는 계기를 설명하는 과정은 부족하다. 딱히 로봇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죽이는 것 같지도 않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주제로 한 영화치고는 긴박감도 모자란다. 그나마 율 브린너의 카리스마가 영화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여전히 멋지다.
  이 영화가 후에 많은 영화들에 영향을 준 사실은 분명하지만, 영화 자체는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쥬라기 공원의 감독이 마이클 클라이튼이 아닌 스티븐 스필버그인 것은 매우 다행이다.)
  하나 더, 당시 ‘최첨단’으로 여겨졌던 영화의 장면들(로봇 율 브린너의 눈에 비친 픽셀 시각이나 복잡해 보이는 로봇 내부의 회로 같은)은 지금 보니 매우 허접하게 느껴진다. 최첨단 로봇을 수리하는데 시계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장면에서는 왠지 실소가 나왔다. 그 시절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지만.




  미드 ‘웨스트월드 시즌 1’의 에피소드 10회를 거의 단숨(이라고는 해도 며칠 동안)에 독파했다. 소재는 같다. 인공지능 로봇이 모험과 향응을 제공하는 휴양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최첨단 놀이터에 기꺼이 돈을 쏟아 붓는 부자들. 시각적으로 더 발전하고, 상상력이 더 구체화됐을 뿐이다. 그것이 훨씬 재미를 키우는 요소이기는 했지만.
  그런데도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과정은 달랐다. 드라마는, 암묵적으로, 시청자들이 이미 영화의 줄거리를 알고 있다는 전제를 두고 출발한다. 리메이크 드라마의 장점이자 한계다. 그 경우 선택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로봇의 배신을 줄거리의 앞쪽으로 끌어당기고 후반부는  위기 속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인간들의 분투기를 박진감 있게 표현하는 것. 다른 하나는, 로봇이 왜, 그리고 어떻게 배신하는 지의 과정을 꼼꼼히 설명해 개연성을 더하는 것. 전자는 영화에서 시도했던 것이고, 후자는 영화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드라마는 후자를 택했다. 로봇이 인간을 ‘본격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10화의 말미다. 시즌 2에 대한 ‘밑밥’이겠지만, 1개 시즌만으로도 충분히 완성도가 있다. (시즌 2가 기다려지기는 하는데, 이게 2018년 가을이나 돼야 방영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그 때 쯤 이면 이 드라마에 대해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한 줄로 평을 하자면, 이야기는 정교하고 연출은 탄탄하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연기자들의 연기력이다. HBO가 심혈을 기울인 드라마인 만큼 캐스팅이 화려하다. 그리고 화려한 그들이 이름값을 한다.
  미국만큼 철저하게 시청률을 의식하고 드라마를 만드는 나라도 없을 것이라고 본다면, 드라마가 제시하는 철학적 성찰이나 인간 사이의 갈등 따위는 딱 보통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간혹 현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그 점이 지나쳐 채널을 돌리게 하지 않는다. 이런 걸 보면, 이제는 단순히 영화나 드라마가 천재 한 명의 영감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드라마(적어도 시즌 1)를 꿰뚫는 주제는 ‘로봇 디스토피아’에 대한 공포다. 그리고 그 공포를 유도하는 것은 인간이다. 자의(인 줄 알았으나 결국 누군가의 의도 때문에)로 ‘각성’하고 인간을 공격하는 살롱 여주인 메이브의 변화를 통해 공포가 점증적으로 표현된다. (로봇 디스토피아 또는 인공지능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는 몇 가지가 있지만, 이 드라마의 원작 영화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례다. ‘에이리언:커버넌트(2017)’에서 인간을 숙주로 하는 외계 생명체보다 더 무서운 것이 AI 로봇의 각성이다. AI로봇 데이브는 스스로 생명체의 창조자가 되기로 하고 인간을 외계 생명체의 먹이로 던진다. 로봇 또는 컴퓨터의 반란을 다룬 영화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에서 시작한다. ‘터미네이터(1984)’가 백미다. ‘매트릭스(1999)’에서 상상력이 더 발전했고 ‘아이, 로봇(2004)’은 영화적 흥미에 초점을 맞췄다. ‘엑스 마키나(2015)’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로봇의 부작용을 다룬다.)

  드라마를 보면서 몇 가지 소소한 재미도 찾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어서 실제 제작자의 의도와 맞는지는 모르겠다.
  우선 배경. 드라마 속 테마파크는 애리조나 주 모뉴먼트 밸리를 그대로 본떴다. 나바호 인디언의 성지로 불리는 모뉴먼트 밸리는 서부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유성영화 시대 서부극의 효시로 불리는 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1939)’를 촬영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AI로봇들을 ‘연출’하는 테마파크 책임자의 이름이 포드(로버트 포드)인 것도 존 포드 감독에 대한 경의 표시가 아닐까 싶다.
  드라마 전개를 이끌면서 궁금증을 끌어내는 악당 로봇의 이름은 와이어트다. 서부 시대 전설적인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의 이름을 땄을 가능성이 크다. ‘오케이목장의 결투(1957)’에서 버트 랭카스터가 맡았던 주인공이 와이어트 어프다. 사후의 전기(傳記)와 영화에서의 묘사 때문에 미국인에게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그의 행적에 대해 ‘명성’과 ‘악명’사이에서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이 드라마가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무는 이름으로 와이어트라는 실제 인물의 이름을 차용한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색지대’에 대한 오마쥬도 나온다. 슬쩍 지나가는 장면에서 언뜻 율 브린너의 실루엣이 등장한다. 얼굴은 뚜렷하지 않지만 검은 옷을 입고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가 영락없이 율브린너다. 율 브린너가 이색지대에서 입고 나왔던 검은 옷은, 그가 ‘황야의 7인(1960)’에서 입고 나왔던 것과 비슷하다. 황야의 7인에서 이색지대, 그리고 웨스트월드까지 오마쥬의 연속인 셈이다.



- 오늘 여행 : Monument Valley, AZ

  유타와 애리조나 접경 지역의 인디언 자치구. 이곳을 방문하기 전부터 미리 예약해서 반드시 The View Hotel 에서 묵으라는 말을 들었다. 이 호텔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호텔이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것도 한 이유지만, 그 보다는 이 호텔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모뉴먼트 밸리의 석양과 야경 때문이다. 오래 전 예약이 아니면 호텔에 묵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쉽지 않다지만, 매일 전화기를 돌리는 노력과 마침 취소된 방이 생긴 행운이 겹친 덕에 예약할 수 있었다. 그 만한 보람이 있었다. 모뉴먼트 밸리 머리 위의 별들은 그 어느 곳에서 본 별보다 아름다웠다.



  석양에 모습을 드러낸 ‘쌍둥이 벙어리장갑(Twin Mittens)’. 몽환적이라는 단어만큼 어울리는 표현이 있을까. 다음날 렌트한 세단으로 도전한 모뉴먼트 밸리 투어. 보통은 SUV나 트럭이 필요하지만 세단으로 둘러보는 관광객들도 많다. 잠시 고운 흙바닥에 바퀴가 빠져 고생하기도 했지만, 이 대자연의 속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2017년 8월 9일 수요일

영구결번 // White Sands National Monument, NW

- 생각, 얕은 지식 : 영구결번

 영구결번(Retired Number)에 대한 글을 쓴 계기는 LG트윈스 이병규의 은퇴식이다. LG트윈스는 은퇴식을 하면서 그의 등번호 9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잠시 주니치 드래건스로 ‘외유’를 하기는 했지만, LG트윈스 선수로 이병규의 공헌도는 매우 높다. 언뜻 ‘이병규만한 활약을 펼친 선수가 없었나’하는 생각도 들지만, 첫 번째 영구결번인 김용수를 제외하면 LG에서 은퇴한 선수 중 이병규를 대체할만한 선수는 생각나지 않는다. (김용수는 은퇴 후가 좋지 않았다.) 인기로 따지면 ‘야생마’ 이상훈이나 ‘캐넌 히터’ 김재현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두 선수 모두 LG트윈스를 떠나 유니폼을 벗었기에 트윈스에서 영구결번을 해줄 것 같지는 않다.
 참, 개인적으로 LG트윈스의 팬은 아니다. 영구결번에 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어떤 이야기를 찾아 읽어도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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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첫 영구결번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메이저리그 첫 영구결번은 뉴욕 양키스의 1루수 루 게릭이 달았던 4번이다. 게릭은 1920년대와 30년대, 베이브 루스와 함께 양키스의 ‘살인 타선’을 이끌던 강타자다. 또 14시즌 동안 2130경기에 연속 출장해 ‘철마(The Iron Horse)’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체력과 의지가 강했던 선수다. 그런 그가 근위축성측색경화증(ALS)라는 어려운 이름의 희귀병에 걸려 갑자기 은퇴하게 된다. 1939년 은퇴식에서 양키스는 그의 업적을 기려 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게릭은 은퇴 2년 뒤 사망했다. 운동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위축되는 이 병을 지금도 ‘루 게릭 병’이라고 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참고로 프로스포츠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는 미국 내셔널풋볼리그(NFL) 뉴욕 자이언츠의 레이 플래허티(1번)다.

 첫 영구결번의 안타까운 이야기는 한국 프로야구에도 있다. KBO리그 첫 영구결번은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의 포수였던 고 김영신의 54번이다. 국가대표 출신 유망주였던 김영신은 1985년 OB에 입단했지만 끝내 주전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원년 우승팀 OB에는 당시 김경문, 조범현 같은 명포수가 즐비했다. 김영신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그는 입단 이듬해 물에 빠져 숨진 채 발견됐다. 사고사라는 추측과 처지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함께 나왔다. OB 구단은 애도의 뜻으로 그의 등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야구에서 가장 유명한 영구결번은 재키 로빈슨의 42번이다.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흑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 데뷔해 그라운드 안팎의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10시즌 동안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야구를 ‘백인의 스포츠’에서 ‘미국의 스포츠’로 만든 그의 업적을 기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1997년 42번을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다만 그 이전까지 42번을 사용하던 선수들만은 계속해서 42번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줬다. 뉴욕 양키즈의 마리아노 리베라가 마지막으로 42번을 달고 뛴 선수다. 그 이후 42번은 아직까진 유일한 전 구단 영구결번이다. 뉴욕 양키스는 마리아노 리베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리아노 리베라의 42번’도 따로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로빈슨이 첫 경기를 치른 4월 15일이면, 메이저리그 모든 선수가 평소에는 착용이 금지된 42번을 달고 그를 추모한다.

 LG 트윈스가 7월9일 ‘적토마’ 이병규의 은퇴식을 열고 그의 등번호 9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KBO리그 영구결번 선수 13명 가운데 우승 경력이 없는 선수는 김영신을 제외하곤 이병규가 유일하다. 프랜차이즈 스타로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만, 팀 전력은 그다지 강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20170709 초고에서)


- 오늘 여행 : White Sands National Monument

#White Sands National Monument, NM


  다른 세계(異界)가 존재한다면 아마도 이런 관문을 통과해야 하지 않을까. 푸른 하늘 아래로 사방이 온통 흰색, 모래보다 고운 모래. 세상에도 이런 곳이 존재했다.
  미국 뉴멕시코주 화이트 샌즈 국가기념물(물론, 미국 국가기념물)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곳이다. 흰 모래, 화이트 샌즈, 다른 말로 표현이 불가능하다. 백사장이라는 단어가 딱 맞는다. 석고 모래여서 눈처럼 하얀 빛깔을 띤다. 선글라스를 써도 하얀색이 느껴질 정도다. (몇몇 사진에서 모래 언덕이 누렇게 보이는 것은, 전적으로 촬영자 혹은 카메라의 탓이다. 전문 사진가도 아니고, 그닥 좋은 카메라도 아니니까.)
  모래가 무대라면 바람은 연출자다. 모래는 물결모양으로 일렁인다. 모래 산 주변으로 듬성듬성 자라난 풀들, 그리고 표지판에 적힌 동물 그림들은 이런 척박한 곳에도 생물이 산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늘을 만들어놓은 피크닉테이블이 운치를 더한다.
  아이들은 모래 산에서 썰매를 타고 내려온다. 방패처럼 생긴 플라스틱 썰매 바닥에 왁스를 칠하면 제법 잘 미끄러진다. 눈썰매만큼 미끄럽지는 않지만, 세상 다른 어느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흰 모래 썰매장의 즐거움을 눈썰매에 비할 것은 아니다.




  앨버커키에서 차로 4시간 쯤 달려 도착했다. 좀 더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도중에 공사 구간이 있어 약간 지체됐던 기억이 있다. 앨라모고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2017년 8월 7일 월요일

생각 여행기 // Kitchener, ON, Canada

생각 여행기, 경험과 추억의 공유

이미 읽혔거나, 그렇지 않았거나.
겪고 느끼고, 읽고 생각한... 얕은 지식


- 오늘 여행 : Kitchener, ON, Canada / Cambridge, ON, Canada

 #Kitchener


  파란 하늘에 비친 구름이 유난히 또렷하던 여름날,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작은 도시 키치너 인근을 지났다. 정확히 그 길이 있는 곳의 지명이 키치너인지 또는 케임브리지인지, 아니면 워털루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키치너라고 믿었던, 쭉 뻗은, 그러나 텅 빈 길이 이국의 느낌을 더했다. 길 끝 보이지 않는 곳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키치너의 원래 이름은 베를린이었다고 한다. 독일계 이민자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20세기 들어와 이름이 바뀌었다. 키치너 인근에는 런던이라는 도시가 있다. 워털루나 케임브리지도 영국의 지명이다. 케임브리지는 보스턴 인근에도 있다. 아마도 이민자들은 지금 살고 있는 곳에 고향의 이름을 붙여 향수를 달랬을 것이다.



#African Lion Safari at Cambridge, ON, Canada


 이 길을 지난 것은 키치너를 방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인근 케임브리지의 명물 동물원인 아프리칸 라이온 사파리(African Lion Safari)를 향하던 길이었다. 1969년 개장한 이 동물원은 동물들을 우리에 가두는 대신 넓은 땅에 놓아 키운다. 에버랜드의 사파리와 비슷하지만 규모가 더 크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에버랜드에서는 전용 사파리 버스를 타고 동물들을 구경하는데 비해, 이곳에서는 ‘내 차’를 몰고 동물들이 사는 곳을 지나갈 수 있다. 특별히 체증이 있거나, 급하게 뒤에서 밀어붙이는 차가 없다면, 시간을 두고 찬찬히 동물들을 관찰할 수 있다. 동물을 관찰하는 동안 차창을 열지 않는다는 규칙만 지키면 된다.
  이런 사파리 말고도 코끼리 공연이나 새 공연 같은 볼거리도 있다. 습지를 통과하는 기차도 타 볼만하다. 말하자면 동물원 테마파크인 셈인데, 하루 종일 둘러봐도 심심하지 않을 정도다. 좁은 공간에 동물을 가둬 키우는 우리로서는 부러운 모습이다. 땅이 넓고, 땅 값이 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전에 자기 차를 몰고 자유롭게 다니더라도 동물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상식과 약속이 통하기 때문에 가능한 시스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