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7일 일요일

The Rookie (2002) / St. Petersburg, FL

The Rookie (2002)


#1 짐 모리스
  옛 영화를 다시 보다. 야구를 주제로 한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 또는 그 중 하나. 영화 자체의 완성도를 떠나 그냥 좋아하는 영화다. 보다보면 흐뭇해지는 영화다. 아마도 ‘꿈을 향한 도전’이라는 진부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소재를 다뤘기 때문일 것일 테지만. 2002년인가 2003년, 비디오(!)로 본 이후 네 댓 차례는 본 듯 하다.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35세의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 리그 역사상 가장 늙은 신인이 된 전직 고등학교 화학 교사의 이야기. 한 때 프로선수를 꿈꿨지만 어깨 부상으로 좌절한 뒤 교사로 전직한 짐 모리스는 텍사스 소도시 빅 레이크의 고교 야구 코치도 겸직하고 있다. 늘 지기만 하는 팀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지역리그 우승을 하면 프로팀 입단 테스트(트라이 아웃)를 받겠다”고 공언했는데, 제자들이 덜컥 우승을 해버려 ‘어쩔 수 없이’ 트라이 아웃에 나선다. 그런데 운동을 쉬는 동안 부상이 나아버렸고, 90마일 후반대의 빠른 볼을 던지게 된 그를 프로팀인 템파베이 데블레이스에서 스카우트 한다. 순탄치 않은 마이너 리그 생활을 이겨낸 뒤 드라마틱하게도 고향인 텍사스에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른다는 이야기다. 갓난아기를 포함해 세 아이를 데리고 경기장에 나가 트라이 아웃에 참가한다는 비현실적인 설정이 영화적인 재미를 더한다.
  실제로 모리스는 두 시즌을 더 뛴 뒤 부상이 재발해 은퇴한다. 데뷔할 때가 이미 다른 선수들은 은퇴할 나이였으니, 꿈을 이룬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모리스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자서전(The Oldiest Rookie)을 썼고 자서전 내용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모리스는 이후 자기계발 강연 시장에 뛰어들어 회당 1만 달러 이상을 받는 강사가 됐다고 하니, 꿈을 향한 집념이 그의 인생을 바꾼 셈이다.

# 2 데니스 퀘이드 & 브라이언 콕스
  야구공을 던지는 모습이 다소 어색하기는 하지만 ‘늙은 신인’ 모리스의 역할을 맡은 한 데니스 퀘이드의 연기도 볼 만 하다. 늙은 신인 역할을 맡은 늙지 않는 배우. 1954년생이니 영화가 개봉됐을 때 퀘이드의 나이가 만으로 마흔 여덟이다. 그 나이에 서른다섯 야구선수 역할을 맡은 것도 대단한데, 영화 속에서 군살 없는 탄탄한 몸을 보여주면서 프로다운 면모를 과시한다. 조금 과장하면 25년 전 이너 스페이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모리스의 메이저리그 데뷔전 당시의 몸이 퀘이드보다 더 후덕한 것처럼 보인다. 이후 급격한 노화를 겪어 더 이상 젊은이 역할은 기대할 수 없게 됐지만, 여전히 자기 실제 나이보다 젊은 역할을 맡는 데는 익숙한 것 같다.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모리스의 아버지, 짐 모리스 시니어 역할을 맡은 브라이언 콕스의 담담한 연기도 인상적이다. 진짜 할아버지가 아니면 못 할 것 같은 할아버지 연기.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마지막 순간 따뜻한 속내를 보여주는 군인 출신다운 연기가 마음에 든다.

# 3 알링턴
  영화속 모리스가 사는 곳은 빅 레이크. 영화에서도 빅 레이크 고교의 야구팀으로 나오지만, 모리스는 실제로는 빅 레이크가 있는 지역인 리건 카운티 고교의 야구팀 코치였다. 영화에서 모리스는 빅 리그 승격이 결정된 뒤 아내에게 전화해 “메이저 리그 구단에는 복장 규정이 있다”며 한 번도 입지 않은 재킷을 다음날 텍사스 주 알링턴의 경기장까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메이저 리그 입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빅 레이크부터 알링턴까지는 자동차로 5시간 이상 떨어져 있다. 5시간 운전이라면 좀 더 극적이었겠지만, 실제 모리스의 집(엄밀하게는 모리스의 아내 로리와 세 자녀가 살던 집)이 있던 샌 안젤로는 알링턴에서 3시간 반 거리다. 로리가 옷을 가져다줬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로리가 그의 경기를 보러 세 아이를 태우고 3시간 반을 운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 때를 회상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는(‘야구팬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에 나온다고) 이야기. 영화에서는 로리 뿐 아니라 동네 주민들이 대거 모리스의 데뷔전을 보러 경기장까지 응원가는 것으로 나온다.




오늘 여행 / 세인트 피터스버그 St. Petersburg, FL

  모리스가 데뷔한 메이저리그 팀은 템파베이 데블 레이즈(Devil Rays). 1998년 메이저 리그에 편입된 비교적 신생 팀이다. 지금은 한국 선수 최지만이 뛰어서 잘 알려진 팀. 2008년 시즌부터 데블을 빼고 레이스로 이름을 바꿨다. 이 팀의 연고지가 세인트 피터스버그다.
  모리스가 입단한 1999년 시즌은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하위권에 맴돌던 시기이고, 여기저기 선수를 구하러 다니던 때다. 레이즈가 조금 더 강팀이었다면 모리스가 메이저리거로 콜업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오래전 데블 레이즈 시절의 홈 구장을 구경한 적이 있다. 기념품도 샀었다.
  레이즈는 플로리다 세인트 피터스버그를 홈으로 하는 팀.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철자가 같다. 인근 도시 템파와 묶어 이 지역을 템파베이라고 부른다. 플로리다에는 Naples(나폴리), Florence(피렌체)처럼 유럽의 아름다운 고도(古都)의 이름을 딴 도시가 많다. 문화 유적이나 경치는 비교할 바 아니지만, 날씨만큼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보다 좋지 않을까 싶다.
  기억에 남았던 곳은 끊어진 다리 낚시터. 배와 충돌하는 사고로 한 가운데가 끊어져버린 다리를 시민을 위한 바다 낚시터로 활용한 구조물이다. 가성비로 따지면 최저 수준의 피싱 피어인 셈인데, 우리 같으면 서둘러 덮어버렸을 과오를, 스스로 잊지 않고 경계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 같아 인상 깊었다. 낚시의 재미는 덤.

2018년 8월 29일 수요일

단양 도담삼봉

단양 도담삼봉

  정도전의 아호 삼봉(三峰)이 도담삼봉에서 따온 것이라는 이야기는 잘 알려졌다. 충주호 건설로 3분의 1일 물에 잠겼다고는 하지만, 과연 물 위의 세 봉우리가 주는 운치는 신비로웠다. 그 옛날 물 한가운데 잠긴 저 봉우리 위에 어떻게 정자를 지었을까. 도덕 정치를 주장한 유학자가 사랑할만한 경치다.   



2018년 6월 25일 월요일

Crepe / Harajuku, Tokyo

Crepe / Harajuku, Tokyo

  원어로는 크레프(Crepe)… 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끄레뻬’ 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익힌 뒤 갖가지 재료를 넣고 말아먹는 간식. 어린시절에는 동네 리어카에서도 만드는 사람들을 제법 본 것 같은데, 지금은 번화가로 나가지 않으면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어린시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재료들이 무척 화려해졌다는 것. 단순히 밀가루 반죽에 크림 좀 발라서 먹던 끄레뻬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만드는 사람의 기술이라면 최대한 얇게, 그렇지만 식감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강원도 평창 인근 시장 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추메밀전과 비슷한 느낌이다.

  만드는 사람의 기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먹는 사람의 기술도 있다. 수 십 가지 재료 중 그 날과 가장 잘 맞는 재료를 고르는 것. 하나하나 순서대로 먹어가는 것이 아니다. 날씨와 기분과 동반자와, 그 밖에 모든 상황을 고려해 가장 적절한 끄레뻬를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기술 중 기술이다.   
 


2018년 5월 20일 일요일

Rome

Rome

  로마는 몇 차례 방문했는데, 그리 크게 변하지 않은 도시다. 몇 천 년 전 또는 몇 백년 전 모습으로 '먹고 사는' 도시인데, 변화를 바라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가장 최근의 방문에서는 늘 봐왔던 로마가 아닌, 어느 정도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기분이 새로왔다. 하긴 어느 도시가 한 가지 면모만 있을까.











2018년 3월 19일 월요일

Charleston, SC

Charleston, SC

#1 앤디 맥도웰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그린카드’ ‘허드슨 호크’ ‘사랑의 블랙홀’. 케이블TV 영화채널에서 몇 번은 봤을 듯 한 이들 영화의 주인공, 앤디 맥도웰(Andy McDowell).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 배우다. 개프니라는 작은 도시 출신인데, 찰스턴과는 자동차로 3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젊은 시절의 앤디를 보면 이상하게 낸시 트래비스(Nancy Travis)와 헷갈리곤 했다. 키도 앤디가 훨씬 크고 이목구비도 뚜렷한 편인데, 웃는 눈매가 비슷해서 그랬던 것 같다. 여하튼 앤디가 앉았던 테이블에서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2. Hyman's Seafood
  찰스턴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으로 꼽히는 곳. 아마도 고급 레스토랑이었으면 이만한 명성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싸지는 않더라도 큰 부담 없는 가격과 캐주얼한 분위기, 무엇보다 보편적인 입맛을 사로잡는 요리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 5대째 가업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여기에 친절도 한 몫을 하지 않을까 싶다. 4대인지 5대인지 모르겠지만, 주인장이 수시로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린이들에게는 아이스크림 쿠폰(그래봤자 식당에서 주는 아이스크림)을 나눠주기도 했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아래층에 있는 기념품 가게다. 식당에서 음식 말고 살 것이 뭐가 있겠느냐는 통념을 깨고 아기자기한 로고 기념품을 많이도 만들었다. 동네 식당이라고 가볍게 넘길 것이 아니다. 어쨌든 이만한 전통이면 자랑할만한 것도 많을 테니.
 

2018년 2월 25일 일요일

Savannah, GA

오늘 여행

서배너 / Savannah, GA

#1
  잠시 인연을 맺은, 정확히는 1년 동안 알고 지내던, 미국인 초등학교 교사 이름이 Savannah 였다. 이름을 들으며 미국 남동부의 멋진 도시 태생이겠거니 했지만, 사실 그 도시에 가본 적도 없다고 했다. 부모의 추억이었을까.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됐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2.
  한 때 국내에서도 인기 있었던 혼혈 배우 데니스 오는 서배너 디자인대 사진학과 출신이다. 그 때문에 찾아간 것은 아니지만, 서배나 도심 한 가운데 있는 학교는 작고 단단한 느낌이었다. 한참 인기 있을 당시는 다니엘 헤니와 비교되고는 했는데, 지금은 뭘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여전히 모델이나 배우로 활동 중일 가능성이 높지만, 관심은 없다.

#3
  서배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어머니 엘런의 고향이다. 조지아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기도 하다. 지금은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미국 남동부를 대표하는 고도(古都) 답게 여전히 멋진 자태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오래 머물만큼 볼거리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잘 구획된 거리와 조지아 식민지 시대를 재현한 고풍스러운 건축물을 보는 재미만으로도 한 번 쯤 방문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더위를 피하려는 의도로 생각되는데, 발코니를 위로 올린 필로티 형태의 집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스패니시 모스(Spanish Moss)를 걸치고 있는, 귀신 나올 듯한 모양의 나무도 볼거리다. 1819년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증기기관선 이름이 서배너호다. 이 항구를 출발해 영국 리버풀로 향했기 때문이다. 강가에 개와함께 나와 배를 향해 흰 천을 흔들었다는 ‘The Waving Girl’ 동상이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천을 흔든 이유는 모르겠다.

#4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한 아름다움을 가진 서배너에는 아픈 역사도 있다. 미국인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울만한 역사는 아니다. 서배너는 17, 18세기 미국에서 가장 번성한 노예 시장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노예들은 서배너 항에서 미국에 첫 발을 내딛었다. 물론, 살아있을 경우에. 애당초 사람이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붙잡힌 흑인 가운데 6분의 1 정도가 항해 도중 죽었다. 이들을 ‘노예’로 길들이는데 더 많은 수의 흑인들이 희생됐다. 주로 영국과 포르투갈 배들이 노예를 실어 날랐다. 










2018년 1월 27일 토요일

'쌀딩크' 박항서

‘쌀딩크’ 박항서, 끝나지 않은 기적

  선수 때부터 머리숱이 적었다. 대머리 미드필더의 원조는 프랑스가 아니라 한국에 있었다. 지네딘 지단이 아니라 박항서다. 미드필더가 링커로 불리던 시절, 팬들은 악의(惡意)없이 그를 ‘대머리 링커’로 불렀다. 단신(1m66)의 약점을 부지런한 몸놀림으로 극복해 국가대표로도 뛰었다. 1988년 은퇴 뒤 한 동안 잊혀졌던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폴란드 전 골을 넣은 황선홍이 달려와 코치인 그를 끌어 않은 명장면 때문이다.

  ▷감독 인생은 화려하지 않았다.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국가대표 감독직을 물려받았지만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동메달에 그쳤다. 프로 감독으로 1부 리그 우승도 없었다. 급기야 치고 올라오는 젊은 후배들에 밀려 몇 년간 실업자로 살기도 했다. 국내 3부 리그격인 창원시청을 지도할 때 베트남 축구협회와 인연이 닿았다. 지난해 10월 새 도전에 나섰다.

  ▷축구는 잘하지 못해도 그 열기만큼은 뜨거운 베트남 국민들은 한국의 3부 리그 출신 대표팀 감독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 전까지 쓰던 포백(4명 수비) 시스템을 쓰리 백으로 바꾸자 갑작스런 전술 변화에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그는 조직력과 기동력을 극대화한 이 전술로 보란 듯 23일 베트남을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 챔피언십 결승에 진출시켰다. 베트남 축구 사상 최고 성적이다. 2002년 한국의 광희가 베트남에서 재현됐다. 박 감독은 ‘베트남의 히딩크’라는 새 별명을 얻었다. 베트남 주요 산물인 쌀을 빗댄 ‘쌀딩크’라는 별명도 생겼다.

  ▷박 감독은 선전(善戰)의 원동력으로 베트남 선수들의 강한 정신력을 꼽았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 중국에도 당당하게 맞선 나라가 베트남이다. 최근 급속한 경제성장의 배경도 의지와 근면이다. 한국은 베트남에 가장 많이 투자한 나라고 베트남은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동남아 국가다. 돈독해지는 한국과 베트남 관계에 박 감독의 ‘매직’이 힘을 더했다. 베트남은 27일 우즈베키스탄과 결승전을 치른다. 기적은 끝나지 않았다. 2002년 히딩크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박 감독도 아직은 배가 고프다. (180124)

2018년 1월 22일 월요일

테니스史 새로 쓴 정현

테니스史 새로 쓴 정현

  여섯 살 소년은 유난히 눈을 자주 깜빡였다. TV를 보면서도 눈을 찡그렸다. 걱정이 된 부모가 정현의 손을 끌고 안과를 찾았다. 검진 결과 약시. 야외활동을 하면서 녹색을 많이 보는 것이 좋다는 의사의 권유에 부모는 소년에게 테니스 라켓을 건넸다. 보기 드문 ‘안경잡이’ 테니스 선수 정현이 운동을 시작한 계기다. 테니스 지도자인 아버지의 핏줄까지 물려받은 정현은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었다.

 ▷정현의 장점은 빠른 공을 눈으로 쫓아 반응하는 동체시력(動體視力)이다. 역설적이지만 정현의 동체시력을 키운 것은 약시다. “시력이 좋지 않아 사물을 볼 때 보통 사람보다 더 집중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동체시력이 발달했다”는 것이 정현의 어머니 김영미 씨의 설명이다. 여기에 약점으로 지적됐던 포핸드와 서브까지 보완해 괄목상대할 성장을 이뤄냈다.

  ▷정현이 만 11세 되던 2007년, 이형택이 2000년에 이어 두 번째로 US오픈 테니스 16강에 진출했다. 이런 그의 활약을 보고 자란 ‘이형택 키드’ 정현이 기어이 일을 냈다. 정현은 22일 호주 오픈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대회 8강에 진출했다. 16강 상대는 정현 스스로 ‘우상’이라고 부른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세계랭킹 14위). 무려 223주간 세계랭킹 1위 자리를 지켰던 강자다. 정현은 이날 자신의 두 우상을 한꺼번에 넘어섰다.

 ▷어린 선수들은 우상을 바라보며 동기를 얻는다. 박세리의 영향을 받은 박인비, 신지애, 최나연은 이제 다음 세대 골퍼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세리 키즈’를 넘어 ‘인비 키즈’라는 말도 나왔다. 과거 어린 투수들이 선호하는 등번호는 에이스를 상징하는 1번이었지만, 메이저리거 박찬호 등장 이후 61번으로 바뀌었다. 한국 여자 피겨스케이트 1인자인 유영(14)은 비록 나이제한에 걸려 평창겨울올림픽은 출전하지 못하지만 4년 뒤 베이징 대회를 준비하는 ‘연아 키드’다. 테니스계에서도 언젠가 ‘정현 키즈’가 두각을 나타낼 날이 오겠지만 그 보다 먼저 정현이 승승장구해 ‘테니스 불모지’ 한국에서 역사를 계속 써갔으면 한다.
(180122)

중국식 규제

중국식 가상화폐 규제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높아졌고, 바다는 작은 물줄기라도 가리지 않았기에 깊어졌다.”(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진(秦)의 재상 이사가 진왕 영정(훗날 시황제)에게 올린 ‘간축객서(諫逐客書)’는 외국 출신 관리를 내쫓는 ‘축객령’을 거둬들이고 문물과 인재를 두루 포용하라는 내용이다. 이를 받아들인 진왕은 개방·개혁 정책으로 천하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하지만 통일이 되자 반대 목소리를 근절한다며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저질렀다.

 ▷역사는 현재의 반영이다. 이전에도 개방과 규제를 병행하는 정책의 뿌리는 오래됐다. 중국은 신사업 규제를 풀어 빠른 시간에 안정된 스타트 업 창업 생태계를 구축했다. 한국이 최근에야 집중 육성하겠다는 드론은 이미 중국이 세계 시장을 장악한 분야다. 기업가치 59조 원이 넘는 디디추싱(滴滴出行)은 한국에서는 아예 시작도 못하는 차량공유 서비스 회사다. 사업은 허용하되 문제가 생기면 규제한다는 ‘사후규제’가 정책의 원칙이다.

 ▷중국은 다양한 신사업에 대해 관대하지만, 체제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분야는 강력히 통제한다. 일부 해외사이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접속을 막는 인터넷검열 ‘만리방화벽(The Great Firewall)’도 명분은 ‘유해사이트 차단’이지만, 실제로는 온라인상의 체제위협 소지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 이 방화벽을 피해 해외사이트에 접속하는 프로그램을 판매한 사업자가 징역 5년 6개월 중형을 선고 받았다.

 ▷중국이 지난해 9월 가상화폐 거래소를 폐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의 통화정책과 조세권, 위안화 해외반출 금지 등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폐쇄된 중국거래소들이 개인간거래(P2P) 사이트를 열어 거래를 계속하자 중국은 15일 P2P사이트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까지 차단할 계획을 밝혔다.

 ▷중국의 초강력 규제 방침에 가상화폐 국제시세가 급락했다. 비트코인은 17일 하루 만에 28%나 떨어졌다. 김동연 부총리가 16일 “거래소 폐쇄 옵션은 살아있다”고 말한 것도 국내는 물론, 국제시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상화폐의 미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그 기반기술인 블록체인의 무한한 발전가능성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의견이 일치한다. 가상화폐를 제도권으로 흡수해 혁신 기술의 싹을 틔우려고 하기보다 강력한 통제 방침을 내비친 김 부총리의 발언은 그래서 씁쓸하다. ‘중국식 규제개혁’을 본받으라고 했더니 ‘중국식 규제’만 배운 것 같다.(180117)

작심삼일

새해결심과 작심삼일

  페이스북을 통해 1월 한 달 동안 금주(禁酒)한다는 ‘드라이 재뉴어리(Dry January)’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연중 한 달만이라도 간을 쉬게 해주자는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를 공식적 캠페인으로 발전시킨 것은 영국 음주 문제 예방 단체 ‘Alcohol Concern’이다. 이 단체 소속 에밀리 로빈슨이 2011년 하프 마라톤 출전을 위해 ‘1월 금주’를 실천했던 경험과 효과를 떠올리며 이듬해 캠페인을 시작했다.

  ▷건강에 관심이 있다면 지난해 뉴욕타임스 건강섹션에서 가장 많이 읽힌 ‘나이 드는 사람을 위한 운동법’ 기사를 참조하는 것도 좋겠다. 나이가 들면 개구리모양 팔다리가 가늘어지고 근육이 힘없이 빠져버리는데 자전거타기같은 운동을 4분한 뒤 3분 쉬는 것을 3차례 이상 반복하는 ‘인터벌 트레이닝’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내용이다. 실험집단과 비교한 결과 적당한 운동 또는 웨이트 트레이닝보다 유전자 활동 변화 측면에서 훨씬 나았다는 것. 특히 나이 들수록 격렬한 운동이 노화세포를 ‘교정’한다는 결과가 눈에 띈다.

  ▷금주와 운동은 다이어트, 금연과 함께 새해 결심의 단골손님이다. 공통 키워드는 건강이다. 예전에는 금연, 금주의 비중이 높았지만 점차 다이어트와 운동에 순위가 밀리고 있다. 취업포털 사이트 잡코리아가 조사한 설문조사에서 직장인들의 61%가 다이어트를, 이어 32%가 운동을 ‘단골 새해계획’으로 꼽았다. 하지만 응답자 77%가 석 달 내 새해 계획이 무너진다고 답했다. 1월 안에 실패한다는 응답도 27%나 됐다.

 ▷작심삼일의 이유로 미국 노스이스턴대 심리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디스테노 박사는 “미래의 만족보다 현재의 즐거움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자제하려는 의지가 오히려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이다. 그는 이 스트레스를 풀 해결 방법으로 이성이 아니라 감사와 연민, 자부심 같은 ‘감정’을 제시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것, 그리고 내가 달성한 소박한 성과를 자랑하는 것이 새해 결심 성공법이라니 뜻밖에 쉽지 않은가.  (180101)

2017년 12월 13일 수요일

Santa Fe, NM

Santa Fe, NM

#1 빌리 더 키드

  거친 시대에는 엉뚱하게 미화되거나 신화화되는 범죄자들이 있다. 평화로운 시절과는 기준이 다르다. 19세기 말 영국 런던 화이트채플의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는 5명(또는 그 이상)의 매춘부를 살해하고도 단지 붙잡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신비스런 인물로 묘사된다. 잭 더 리퍼는 범죄 현장에 “유대인은 비난받을 일이 없다(The Jewes are the men that will not be blamed for nothing)”는 문구를 남겼다고 하는데, 과감하게 스스로의 자취를 표시하는 범인의 모습에서 대중은 공포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잭 더 리퍼는 이후 연구서와 소설을 포함한 책과 영화, 뮤지컬의 단골 소재로 확대 재생산됐다.
  잭 더 리퍼의 살인 행각(1888년)과 비슷한 시기, 정확히는 11년 뒤 미국 와이오밍에서는 ‘부치 캐시디 와일드 번치(Butch Cassidy’s Wild Bunch)’ 라는 무법자 집단이 활개 치기 시작했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1969)’에 나오는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폴 뉴먼이나 로버트 레드포드 같은 매력적인 남자 배우들, 게다가 그들 못지않게 매력적인 여배우 캐서린 로스와의 로맨스까지 더해진 영화로만 보면 매우 낭만적인 존재들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강도 행각을 일삼던 악질 범죄자들이었다고 한다. 이들 역시 미화돼 재생산된 경우다.
  악당의 미화와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이 악당을 빼놓는다면 섭섭할 수도 있겠다. 잭 더 리퍼보다 10년쯤 먼저 활동했던, 하지만 살인 건수로만 따지면 잭 더 리퍼를 훨씬 능가하는 서부시대 무법자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 역시 전설로 남은 악당이다. 뉴욕에서 태어나 뉴멕시코에서 생을 마감했다. 헨리 맥카티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스스로를 윌리엄 H. 보니라는 이름으로 부른,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빌리 더 키드’로 더 유명한 이 총잡이는 죽은 뒤 그림과 시, 책, 음악,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통해 부활했다. 이미 1930년에 ‘빌리 더 키드’라는 영화가 나왔고, 1941년에는 ‘산타페의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 in Santa Fe)’라는 영화도 나왔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가 영화 ‘영 건(Young Gus·1988)’에서 빌리 더 키드 역할을 맡았다. 이런 것만 봐도 미국인들이 얼마나 빌리 더 키드를 좋아하는 지 알 수 있다.
  신화가 되기 위해서는 극적인 사건이 필요하다. 잭 더 리퍼의 편지나 부치 캐시디 일당의 열차 강도처럼. 빌리 더 키드의 명성을 높여준 것은 링컨 카운티 전투다. 영화 ‘영 건’은 이 전투를 소재로 만들었다. 뉴멕시코 지역 상권을 두고 벌어진 신구 세력의 다툼인데, 빌리 더 키드는 열세인 쪽에 서서 뛰어난 총격 실력을 발휘하며 일약 영웅으로 부상했다.
  굳이 여기서 빌리 더 키드의 나머지 인생을 옮겨 적지 않더라도, 그가 뛰어난 총잡이면서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21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21명 이상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이 무법자를 굳이 후세가 옹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부 개척시대의 향수를 간직한 미국인들에게 ‘빌리 더 키드’는 범죄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 같다.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호기심을 자극할 대상임은 충분하다. 이런 점을 노리고 뉴멕시코주는 빌리 더 키드를 관광 상품으로 개발했다. 실제로 빌리 더 키드가 뉴멕시코주에 산 것은 9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긴 나이로 보면 거의 반평생을 산 셈이다. 뉴멕시코주의 주도(州都)가 산타페다.


# 2. 조지아 오키프

  그의 꽃 그림이나 짐승 해골 그림에서 관능미를 찾으려고 했다면, 그의 인생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꽃은 꽃처럼, 뼈는 뼈처럼 그렸으나 꽃 이상, 뼈 이상, 사막 이상의 가치를 표현한 화가. 시대의 발걸음을 신경 쓰지 않았기에 오히려 시대를 앞서간 화가. 오키프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연인이었는지, 아니면 스티글리츠가 오키프의 연인이었는지. 예술의 도시 산타페를 만든 고독한 삶.




# 3. 미야자와 리에

  산타페에서 미야자와 리에를 떠올리는 세대라면 조금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1991년 나온 이 사진집은 엄밀하게는 사진작가인 키신 시노야마의 책이지만, 피사체인 미야자와만 부각됐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 사진집으로 미야자와는 일약 일본을 뛰어넘어 세계적인 화제가 됐지만,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랜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 물론 다카노하나와의 파문 등 여러 사건도 그 중 하나다.
  이제 더 이상 청춘스타가 아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2014)’나 ‘종이달(2015)’을 보면, 엄마 역할, 주부 역할이 그렇게 어울릴 수 없다. 그렇다고 ‘아줌마’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중년 여성은 아니다. 목욕탕집 여주인을 연기해도(행복 목욕탕·2017) 묘한 매력을 주는 중년. ‘산타페’의 분위기가 여전히 조금은 남아 았다. 아도비 건축물과 어울리는 얼굴.




2017년 11월 16일 목요일

독재자 // Verona

독재자

  “미안합니다. 나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누구를 다스리거나 정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찰리 채플린은 그의 첫 유성 영화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1940)’에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독재국가 토매니아의 지도자 힌켈과 똑 닮은 이발사 찰리. 겉모습 때문에 대중에게 힌켈로 오인돼 단상에 오른 찰리는 ‘세계정복을 꿈꾸는 독재자’의 연설과는 동떨어진, 이 유명한 ‘평화 연설’을 한다. 아돌프 히틀러와 비슷한 복장과 제스처, 하지만 되레 평화를 이야기하는 이 장면은 연설을 통해 독일 국민을 사로잡은 독재자 히틀러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대목이다. 일본 극작가 오노 히로유키의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에는 채플린이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자료 영상을 반복해서 보면서 히틀러의 일거수일투족을 연구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 영화는 탁월한 연설로 군중 심리를 사로잡은 뒤 독재자가 된 히틀러를 비판한 것이다. 히틀러라고 독재자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은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하며 대중의 환심을 샀다. 기존 정치 세력은 이런 히틀러를 꼭두각시 총리로 내세워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정권을 잡자 히틀러가 본색을 드러냈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금지하고, 차례로 정적(政敵)을 숙청했다. 입법권과 사법권까지 장악하고는 1934년 전권을 행사하는 총통에 오른다.

▷독재자의 탄생 과정은 대체로 비슷하다. 처음에는 대중의 인기를 얻고 집권하지만 집권 후에는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폭정을 휘두른다. 15일 군부 쿠데타로 37년 권좌에서 쫓겨나 가택 연금된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93)도 비슷하다. 그는 1980년 짐바브웨가 영국에서 독립하기까지 국내외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이끈 독립영웅이었다.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총리가 된 뒤에도 초기에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국민의 인기를 얻었지만, 1987년 무제한 연임이 가능한 6년 대통령제로 헌법을 바꾼 뒤에는 독재자로 돌변했다.

▷무가베는 ‘아프리카의 김일성’으로도 불린다. 독립운동 때부터 북한의 지원을 받은 그는 1980년 방북해 김일성의 ‘유일 독재’와 ‘우상화 정책’을 배웠다. 자신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고 동상을 세우며 김일성 따라하기에 나섰다. 1994년 김일성이 죽자 추모위원회를 꾸렸을 정도로 무가베의 김일성 숭배는 유명하다. 김정일에게는 2010년 야생동물 한 쌍씩을 선물하려다 국제환경단체의 비판에 무산된 적이 있고, 2014년에는 김정은에게 500만 달러를 주고 동상 제작을 의뢰하기도 했다. 나라 경제를 파탄내고서 통치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공통점이다.

▷독재자(dictator)라는 단어는 고대 로마 공화정의 관직 ‘딕타토르(독재관·獨裁官)’에서 유래했다. 로마는 국가 비상사태를 맞으면 전권을 행사하는 독재관을 임명했다. 신속한 결정을 내리기 위한 조치다. 독재관이 내린 결정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마는 현명했다. 비상사태가 해결되면 독재관은 물러났다. 초기 독재관의 임기는 6개월을 넘지 않았고 후기로 가더라도 1년이 최장이었다. 클라우디오 술라는 임기가 없는 독재관을 맡기도 했지만 2년 만에 스스로 물러났다. 공화정 말기 줄리우스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에 올라 이 전통을 깼다가 “황제가 되려 한다”는 비난 속에 암살당했다. (171116)




- 오늘 여행 : Verona

  베로나 방문은 두 차례. 첫 방문과 두 번째 방문 사이에는 14년의 간격이 있다.
  베로나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다른 하나는 야외 오페라다.

  줄리엣은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지만, 베로나에는 ‘줄리엣의 집’ 이라는 관광 명소가 있다. ‘로미오의 집’과 ‘줄리엣의 무덤’도 있다지만 줄리엣의 집만큼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은 아니다. 줄리엣의 집에는 그 유명한 발코니가 있다.
  셰익스피어가 베로나를 방문했다는 기록은 없다. 줄리엣의 유적들도 모두 20세기 초에 베로나시가 ‘지정’한 것이다. 어쩌면 셰익스피어의 명성에 기댄 상술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러브 스토리의 배경은 스스로 살을 붙이고 이야기를 쌓아갔다. 예를 들어 줄리엣 동상의 오른쪽 가슴을 만지면 행운이 생긴다는 전설 따위 들이다.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한 번 만지고 왔다.) 지금은 러브 스토리의 낭만은 사라지고 그저 한번쯤 로미오나 줄리엣이 되보고 싶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간이 됐다.


  베로나는 야외 오페라의 고장이기도 하다. 1세기 초에 만들어진 베로나 아레나에서 매년 야외 오페라 축제가 열린다. 검투사가 목숨을 걸고 상대 검투사와 싸우거나, 맹수를 쓰러뜨리기 위해 몸부림치던 피비린내 나던 장소가 예술의 전당으로 거듭났다. ‘공연장’ 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를 게 없지만, 여흥의 수단으로 보면 천지차이다.
  타원형인 베로나 아레나는 긴 쪽 길이가 140m인 축구장 크기의 대형 건축물. 지어진 지 2000년이 됐지만 여전히 끄떡없이 한번에 관객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십여 년 전에는 운이 좋아 이 야외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당시 감상한 오페라는 아이다였는데,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감독인 프랑코 제피렐리의 연출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감독이 연출한 오페라를 봤던 여운은 지금도 묘하게 남아있다.
  두 번째 방문은 오래전 가봤던 명소들을 스치듯 지나가며 추억을 곱씹을 기회였다. 수백 년 동안 변하지 않은 거리가 불과 십여 년 만에 변할 리 없었다.







2017년 10월 30일 월요일

바비큐 小考

  “교수님이 젊은 시절 텍사스에서 살아서 바비큐도 텍사스 식으로 주문했대요. 노스캐롤라이나식과는 다를 겁니다.”
  한 미국인 교수 집에 초대를 받아 갔을 때 들은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엄밀하게는 말은 알아들었지만 뜻을 몰랐다. 바비큐면 바비큐지 텍사스식은 뭐고, 캐롤라이나식은 뭐란 말인가. 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바비큐는 어느 동네 방식이었던 걸까.
  그런데, 미국 주 하나 정도 크기(또는 그 보다 작은)인 한국에도 전라도식 김치, 경상도식 김치가 구분되는 마당에, 넓은 미국에서 지역에 따른 바비큐 구분이 없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터였다.

  불에 고기를 굽는 바비큐는 사실 고기를 먹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회자(膾炙)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옛날에는 날고기 아니면 구운 고기였다. 찌거나 삶는 방식도 있겠지만, 역시 고기는 굽는 게 가장 사람들의 입맛을 자극했던 것 같다. 편한데다 맛도 있다. 카우보이들이 많은 미국에서 발달한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런 미국이라면, 한국의 고유한 요리로 주장하는 ‘불고기’도 결국 ‘특이한 바비큐’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듯 하다. 식탁에서 직접 구워먹는 독특한 문화와 미리 양념을 재워두는 정성도, 바비큐의 배리에이션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다.

 돼지고기 바비큐라면 역시 슬라이스 보다는 잘게 찢은 풀드 포크(pulled pork)가 제 맛이다. 찾아본 바로는 멤피스(테네시)와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캔자스시티(미주리), 센트럴 텍사스, 이스트 텍사스, 앨러배마 등이 저마다 독특한 바비큐를 자랑한다. 노스캐롤라이나 식에도 이스트 스타일과 렉싱턴 스타일이 있다고 한다. 맛을 글로 표현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것이 있을까. 여하튼 설명을 죽 보니, 주로 먹었던 것은 새콤한 식초향이 감도는 노스캐롤라이나 식이었던 것 같다. 노스캐롤라이나는 ‘바비큐 협회(NC Barbecue Society)’에서 선정한 ‘바비큐 트레일(Historic Barbecue Trail)’이 있을 정도로 바비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고장이다.

  고기 자체를 중요시하는 텍사스식이나 노스캐롤라이나 스타일에 머스터드소스를 곁들이는 사우스캐롤라이나식도 궁금하긴 하다. 절충형도 있다. 앨라배마식은 텍사스와 노스캐롤라이나식의 중간쯤이라고 한다. 마요네즈와 식초를 섞은 소스로 만든 풀드 포크를 햄버거 빵에 넣어 먹는 샌드위치라는데, 버밍엄을 지나며 일부러 ‘바비큐 맛집’을 찾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말 허름한 가게. 여행안내 책자가 아니었으면 결코 지나가다 들를만한 외형은 아니었다. 반신반의하고 들어갔다 두 번 놀랐다. 첫째, 생각보다 손님이 많은데 놀랐고 둘째, 맛은 결코 ‘허름하지’ 않았던 데 놀랐다.

  청계천 야시장 푸드트럭에서 오랜만에 풀드 포크 바비큐를 맛봤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간 것이다. 미국 요리사가 만들어준다는 바비큐가 TV에 나온 뒤 인터넷에서도 유명해졌다. 예전 버밍엄의 샌드위치 맛을 기대하고 찾아갔지만, 약간 느낌이 달랐다. 이건 도대체 어느 동네 식일까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우리 입맛에 맞춘 ‘서울식’일 가능성이 높으니….


2017년 9월 19일 화요일

'로켓맨' 김정은

‘로켓맨’ 김정은

▷구효서 작가의 단편소설 ‘별명의 달인’에는 중학생 시절 친구들의 특징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 별명을 붙이는 ‘라즈니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라즈니시는 별명에 대해 친구들에게 따로 설명을 하지 않지만, 다른 친구들은 모두 그 의미를 단번에 이해했다. 토를 달지도 않았다. 그 만큼 절묘한 별명 짓기의 달인이랄까. 작가는 라즈니시가 ‘상대를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알았기 때문에’ 별명을 잘 지었다고 설명한다. 소설 속에는 ‘구절판 개고기’나 ‘개발길질’, ‘나무젓가락1’, ‘나무젓가락2’ 같은 독특한 별명이 나온다.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작명’한 것이거나, 어쩌면 작가의 학창 시절 실제로 주변에서 불렸던 친구들의 별명일지도 모르겠다.

▷온갖 별명이 난무하는 학교만큼 별명이 많은 곳이 정치계다. 정치인에게 별명은 양날의 칼 같은 존재다. 대중에게 인지도를 높일 수도 있고 친근하게 접근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도 있어서다. 대부분 정치인은 긍정적, 부정적 의미의 별명 한 두 개씩은 갖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지자들에게 ‘이니’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답답하다는 의미에서 ‘고구마’나 ‘고답이’라고 불렸던 것이 한 사례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한 때 잘 나갈 때는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지만, 당선된 후에는 ‘수첩공주’나 ‘불통공주’가 별명이었다. 정치인 별명은 대부분 대중이나 언론이 붙여준 것이다.

▷다른 사람의 별명을 직접 만드는 정치인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라즈니시 같은 ‘별명의 달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적(政敵)들에게 별명을 붙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성격이나 외형적 특징을 잡은 별명이 아니라, 깎아내리기 위한 별명이라는 점이 라즈니시와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공화당 경선 토론에서 마코 루비오 플로리다주 상원의원을 ‘꼬마 마코(Little Marco)’라고 불렀다. 지명도가 낮다는 것을 비꼰 것이다. 테드 크루즈 텍사스주 상원의원은 ‘거짓말쟁이 테드(Lyin’ Ted)’라는 별명을 붙였고,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는 ‘비뚤어진 힐러리(Crooked Hillary)’ ‘썩은 힐러리(Rotten Hillary)’라는 별명으로 이메일 스캔들 등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공격했다.

▷이런 트럼프가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을 ‘로켓맨(Rocket Man)’으로 불렀다.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한 트럼프 대통령은 17일(현지 시간) 트위터에 “문 대통령에게 ‘로켓맨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봤다”고 적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를 두고 “단지 알파벳 아홉 글자로 대통령은 김정은을 조롱하고 북한 정권의 미사일 무기를 하찮게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엘튼 존의 유명한 노래를 떠올리게도 한다”고 했다. 로켓맨은 엘튼 존이 1972년 발표한 노래 제목이다. 우주에서 지구와 가족을 그리워하는 우주비행사(로켓맨)의 독백이 가사 내용이다.

▷트럼프의 트윗 이후 미국 소셜네트워크사이트(SNS)에서는 해석이 분분했다. 가사 중 ‘혼자서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Burnin’ out this fuse, up here alone)’는 부분이 김정은을 빗댄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화성은 애 키우기 적당한 곳이 아니야(Mars ain't the kind of place to raise your kids)’라는 구절을 ‘북한은 애 키우기 적당한 곳이 아니야(N.K. ain't the kind of place to raise your kids)’라고 해석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가 엘튼 존의 명곡을 김정은과 비교해 망쳐버렸다’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나온 것을 보면, 이번에는 별명을 썩 잘 붙인 것 같지는 않다. (170918)


2017년 9월 14일 목요일

NFL의 한국인 키커

  미국 프로미식축구인 NFL에도 외국인(미국 기준으로 외국인) 또는 외국 태생 선수들이 없지는 않다. 지금은 외국인 선수가 50명 정도가 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계(또는 출생)도 몇 명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선수를 꼽으라면 ‘슈퍼볼 MVP’ 하인즈 워드일게다. 그 외에도 대학에서는 주목받았으나 단 한 시즌만에 프로 경력을 마감(확실치는 않음)한 존 리라는 ‘비운의 키커’가 있고, 또 몇 명의 한국계 선수들이 더 있다. 하인즈 워드와 존 리는 한국 출생이기는 했지만 한국 국적은 아니었다.

  올 시즌 처음 NFL에 한국인 선수가 데뷔했다. NFL 중계를 볼 기회가 많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관심을 갖고 볼 만 일이 생겼다. 생겼다. LA 차저스의 구영회라는 키커인데, 첫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니 마지막 필드골 실패(실수는 수비 라인이 한 것)가 옥의 티지만, 꽤 안정적으로 찬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저스는 원래 LA에서 출발했지만 오랫동안 샌 디에고를 연고지로 사용하다 다시 LA로 돌아갔다.

  원래 미식축구라는 게 미국 외에서는 인기가 그리 높지 않아서 야구나 축구처럼 외국인 선수가 많지 않다. 주요 미국 프로스포츠 가운데 외국인(또는 외국 태생) 선수 비율이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그래도 간혹 두각을 나타내는 외국인(또는 외국 태생) 선수들이 있다. 럭비 선수 출신을 제외하면, 특히 유명한 선수들은 스페셜 팀, 그 중에서도 키커가 눈에 띈다.  아마도 축구나 격투기처럼 다른 종목에서 ‘차는 훈련’을 해 온 선수들이 많아서가 아닐까 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사실 외국 태생 키커가 많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특이한 것은 역대 가장 유명한 두 명의 키커가 모두 외국 태생이라는 점이다. 덴마크 출신인 Morten Andersen(모르텐 안데르센이라고 읽나)과 남아공 출신 개리 앤더슨(이라고 읽을 것 같음, Gary Anderson)인데, 나란히 역대 스코어 랭킹 1, 2위다. 찾아보니 Andersen이 2544점, Anderson이 2434점을 올렸다. 둘 다 선수생활을 오래했는데, Andersen이 25년, Anderson이 18년을 프로로 뛰었다. 아마도 자기 관리만 잘 하면, 다른 포지션과 달리 외부 충격이 적은 포지션 성격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둘 다 1982년에 데뷔했는데, 선수 생활을 오래 해 준 덕에, 경기를 봤던 기억이 가물가물 난다. 여하튼 한국인 구영회도 언젠가 이런 외국인 선수들 사이에 이름을 올렸으면 하는데, 존 리라는 어정쩡한 선례가 있으므로 어찌될지는 두고봐야할 일이다. 존 리가 뛰었을 때는 너무 예전이어서 플레이는 기억나지 않고 신문에서 읽은 기억은 난다.

  참, 하나 더. 좀 다른 이야기인데, 여기서 말하는 키커는 플레이스키커를 의미한다. 누가(홀더) 잡아준 공을 차는 것. 스스로 공을 들고 차는 펀터(Punter)와는 구분되는데, 키커가 공을 ‘깔끔하게’ 차야한다면, 펀터는 공을 ‘지저분하게’ 그리고 ‘적당히’ 차야 잘 차는 것이다. 무조건 멀리 차는 것이 아니라 엔드라인 끝까지만 가야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제대로 잡지 못하게 차는 것도 중요하고.

  이처럼 차는 선수도 구분될 정도로 분업화가 뚜렷한 것이 미식축구인데, 공을 차는 선수를 위해 뒤로 공을 던져주는 선수도 따로 포지션이 있다. 롱 스내퍼라는 포지션이다. 평소 공격을 할 때는 센터가 쿼터백에게 가랑이 사이로 짧게 스냅을 해주고 블로킹에 들어가는데 비해, 롱 스내퍼는 키커에게 멀리 던져주는(그래서 롱 스내퍼) 것이 주요 역할이다. 롱 스내퍼는 필드골이나 펀트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별로 티가 안 나는 포지션.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아마도 가장 유명하기 때문에) 롱 스내퍼는 존 도렌보스일텐데, 그건 플레이 때문이 아니라 필라델피아 이글스 선수 시절 아메리카스 갓 탤런트에 마술사로 출연해 결승까지 진출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뉴올리언스 세인츠로 이적한 듯.

2017년 8월 30일 수요일

'공짜 점심'과 '미끼 상품' // New Orleans, LA

- 잡설 : ‘공짜 점심’과 ‘미끼 상품’

  공짜 점심(Free Lunch)은 없다. 당장은 공짜라고 생각되지만, 실은 대가가 있다. 그것도 공짜로 먹은 점심보다 더 한 대가를 치러야한다.
  공짜 점심은 19세기 미국(특별히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유래됐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사실 공짜 점심이 아니라 술에 끼워 파는 메뉴였다. 당시 식당들이 노동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한 방편이었는데, 점심을 공짜로 주는 대신 술을 함께 팔았다. 적당한 안주가 곁들여진 술 한 잔은 또 다른 한 잔을 끌어드리는 법이어서, 식당 주인으로서는 공짜 점심의 비용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지출이 늘어났다. 공짜로 점심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점심이 곁들여진 비싼 주안상을 사는 셈이었다.
  여기서 유래된 공짜 점심이란 말은 이제 여러 분야에서 쓰이고 있다. 금융 상품의 수익과 리스크를 논하는데도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표현을 쓴다.
  공짜 점심은 미끼 상품(Loss Leader)과는 좀 다르다. 공짜 점심이 끼워 팔기의 현혹이라면, 미끼 상품은 호객의 현혹이다. 보통 가격보다 훨씬 싼 가격을 책정한 상품들이다. 일단 자기 상점으로 손님을 끌어오려는 의도에서 원가보다 싸게 판매하는 상품들이다. 한정 세일인 경우가 많다.
  공짜 점심과 달리 미끼 상품은, 그 자체만 산다고 해서 상점 주인이 뭐라고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 심리가 묘해서, 미끼 상품에 혹해 일단 상점에 들어가고 나면, 뭐든지 사고 싶어진다. 결과로는 공짜 점심이나 미끼 상품이나 다를 바 없다.

  요즘 하도 공짜 점심이나 미끼 상품 같은 일이 많아 그적거린 잡설.




- 오늘 여행 : New Orleans, LA

  


과연 단어 몇 개로 설명이 될는지.

  재즈, 낭만, 남부의 맛, 천천히, 쉽게, Big Easy, 검보, 포보이, 크로피쉬, 크랩, 케이준,  베네와 카페오레, 프랜치쿼터, 버본 스트리트, 마르디그라스, 그리고 Mississippi. 










뉴올리언스 여행때 참고했던 소개글



2017년 8월 20일 일요일

이색지대(1973)와 웨스트월드(2016) // Monument Valley

- 잡설 : 이색지대(1973)와 웨스트월드(2016)

  영화 ‘이색지대(Westworld·1973)’를 동영상으로 다시 보게 된 것은 HBO의 미드 ‘웨스트월드(Westworld·2016)’ 때문이다. 미드 웨스트월드가 이 영화의 리메이크 작이다.
  영화를 볼 때는 원제가 웨스트월드인 것도 몰랐다. 토요명화인지 명화극장인지, 또는 다른 특선영화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린 시절 TV에서 이 영화를 매우 인상 깊게 본 기억만은 또렷하다. 무뚝뚝한 살인 로봇으로 나오는 율 브린너의 연기는 어린 시각에도 충격적이었다.
  다시 봐도 느낌은 처음 봤을 때와 비슷했다. 인간과 똑 같은 로봇이 등장해 온갖 모험과 향응을 제공하는 휴양지, 그곳을 찾는 인간들과 어느 순간 인간을 배신하는 로봇, 뒤따르는 위기와 공포. 40여 년 전이지만, 지금 그대로 영화에 적용한다고 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대단한 상상력이다. 미드의 소재로 ‘재활용’되더라도 손색없는 상상력이다. 미드를 보기 전까지는 이 영화의 각본과 감독이 마이클 클라이튼이라는 것을 몰랐다. 생각해보니 이 영화의 주제는 훗날 ‘쥬라기 공원(1993)’을 통해 재현된다. 마이클 클라이튼은 쥬라기 공원의 원작자이며 각본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그리 높지 않다. 어린 시절엔 매우 흥미진진하게 봤지만, 다시 보니 아무리 오래된 영화라고 해도 허술한 구석이 너무 많다. 하긴 영화의 완성도라는 게 기술의 발전과는 크게 관련은 없는 것이지만. 어쨌든 복선은 있지만 로봇이 오작동하는 계기를 설명하는 과정은 부족하다. 딱히 로봇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죽이는 것 같지도 않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주제로 한 영화치고는 긴박감도 모자란다. 그나마 율 브린너의 카리스마가 영화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여전히 멋지다.
  이 영화가 후에 많은 영화들에 영향을 준 사실은 분명하지만, 영화 자체는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쥬라기 공원의 감독이 마이클 클라이튼이 아닌 스티븐 스필버그인 것은 매우 다행이다.)
  하나 더, 당시 ‘최첨단’으로 여겨졌던 영화의 장면들(로봇 율 브린너의 눈에 비친 픽셀 시각이나 복잡해 보이는 로봇 내부의 회로 같은)은 지금 보니 매우 허접하게 느껴진다. 최첨단 로봇을 수리하는데 시계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장면에서는 왠지 실소가 나왔다. 그 시절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지만.




  미드 ‘웨스트월드 시즌 1’의 에피소드 10회를 거의 단숨(이라고는 해도 며칠 동안)에 독파했다. 소재는 같다. 인공지능 로봇이 모험과 향응을 제공하는 휴양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최첨단 놀이터에 기꺼이 돈을 쏟아 붓는 부자들. 시각적으로 더 발전하고, 상상력이 더 구체화됐을 뿐이다. 그것이 훨씬 재미를 키우는 요소이기는 했지만.
  그런데도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과정은 달랐다. 드라마는, 암묵적으로, 시청자들이 이미 영화의 줄거리를 알고 있다는 전제를 두고 출발한다. 리메이크 드라마의 장점이자 한계다. 그 경우 선택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로봇의 배신을 줄거리의 앞쪽으로 끌어당기고 후반부는  위기 속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인간들의 분투기를 박진감 있게 표현하는 것. 다른 하나는, 로봇이 왜, 그리고 어떻게 배신하는 지의 과정을 꼼꼼히 설명해 개연성을 더하는 것. 전자는 영화에서 시도했던 것이고, 후자는 영화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드라마는 후자를 택했다. 로봇이 인간을 ‘본격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10화의 말미다. 시즌 2에 대한 ‘밑밥’이겠지만, 1개 시즌만으로도 충분히 완성도가 있다. (시즌 2가 기다려지기는 하는데, 이게 2018년 가을이나 돼야 방영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그 때 쯤 이면 이 드라마에 대해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한 줄로 평을 하자면, 이야기는 정교하고 연출은 탄탄하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연기자들의 연기력이다. HBO가 심혈을 기울인 드라마인 만큼 캐스팅이 화려하다. 그리고 화려한 그들이 이름값을 한다.
  미국만큼 철저하게 시청률을 의식하고 드라마를 만드는 나라도 없을 것이라고 본다면, 드라마가 제시하는 철학적 성찰이나 인간 사이의 갈등 따위는 딱 보통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간혹 현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그 점이 지나쳐 채널을 돌리게 하지 않는다. 이런 걸 보면, 이제는 단순히 영화나 드라마가 천재 한 명의 영감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드라마(적어도 시즌 1)를 꿰뚫는 주제는 ‘로봇 디스토피아’에 대한 공포다. 그리고 그 공포를 유도하는 것은 인간이다. 자의(인 줄 알았으나 결국 누군가의 의도 때문에)로 ‘각성’하고 인간을 공격하는 살롱 여주인 메이브의 변화를 통해 공포가 점증적으로 표현된다. (로봇 디스토피아 또는 인공지능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는 몇 가지가 있지만, 이 드라마의 원작 영화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례다. ‘에이리언:커버넌트(2017)’에서 인간을 숙주로 하는 외계 생명체보다 더 무서운 것이 AI 로봇의 각성이다. AI로봇 데이브는 스스로 생명체의 창조자가 되기로 하고 인간을 외계 생명체의 먹이로 던진다. 로봇 또는 컴퓨터의 반란을 다룬 영화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에서 시작한다. ‘터미네이터(1984)’가 백미다. ‘매트릭스(1999)’에서 상상력이 더 발전했고 ‘아이, 로봇(2004)’은 영화적 흥미에 초점을 맞췄다. ‘엑스 마키나(2015)’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로봇의 부작용을 다룬다.)

  드라마를 보면서 몇 가지 소소한 재미도 찾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어서 실제 제작자의 의도와 맞는지는 모르겠다.
  우선 배경. 드라마 속 테마파크는 애리조나 주 모뉴먼트 밸리를 그대로 본떴다. 나바호 인디언의 성지로 불리는 모뉴먼트 밸리는 서부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유성영화 시대 서부극의 효시로 불리는 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1939)’를 촬영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AI로봇들을 ‘연출’하는 테마파크 책임자의 이름이 포드(로버트 포드)인 것도 존 포드 감독에 대한 경의 표시가 아닐까 싶다.
  드라마 전개를 이끌면서 궁금증을 끌어내는 악당 로봇의 이름은 와이어트다. 서부 시대 전설적인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의 이름을 땄을 가능성이 크다. ‘오케이목장의 결투(1957)’에서 버트 랭카스터가 맡았던 주인공이 와이어트 어프다. 사후의 전기(傳記)와 영화에서의 묘사 때문에 미국인에게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그의 행적에 대해 ‘명성’과 ‘악명’사이에서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이 드라마가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무는 이름으로 와이어트라는 실제 인물의 이름을 차용한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색지대’에 대한 오마쥬도 나온다. 슬쩍 지나가는 장면에서 언뜻 율 브린너의 실루엣이 등장한다. 얼굴은 뚜렷하지 않지만 검은 옷을 입고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가 영락없이 율브린너다. 율 브린너가 이색지대에서 입고 나왔던 검은 옷은, 그가 ‘황야의 7인(1960)’에서 입고 나왔던 것과 비슷하다. 황야의 7인에서 이색지대, 그리고 웨스트월드까지 오마쥬의 연속인 셈이다.



- 오늘 여행 : Monument Valley, AZ

  유타와 애리조나 접경 지역의 인디언 자치구. 이곳을 방문하기 전부터 미리 예약해서 반드시 The View Hotel 에서 묵으라는 말을 들었다. 이 호텔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호텔이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것도 한 이유지만, 그 보다는 이 호텔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모뉴먼트 밸리의 석양과 야경 때문이다. 오래 전 예약이 아니면 호텔에 묵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쉽지 않다지만, 매일 전화기를 돌리는 노력과 마침 취소된 방이 생긴 행운이 겹친 덕에 예약할 수 있었다. 그 만한 보람이 있었다. 모뉴먼트 밸리 머리 위의 별들은 그 어느 곳에서 본 별보다 아름다웠다.



  석양에 모습을 드러낸 ‘쌍둥이 벙어리장갑(Twin Mittens)’. 몽환적이라는 단어만큼 어울리는 표현이 있을까. 다음날 렌트한 세단으로 도전한 모뉴먼트 밸리 투어. 보통은 SUV나 트럭이 필요하지만 세단으로 둘러보는 관광객들도 많다. 잠시 고운 흙바닥에 바퀴가 빠져 고생하기도 했지만, 이 대자연의 속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감동적이었다.